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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안전한 관계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에서

내게 최고의 장면은 단연, 문청과 관미가 '로렐라이'를 듣는 부분이다.


귀머거리 청년 문청과 그를 둘러싼 가족, 친구들을 통해

대만의 근현대사 격변기의 비극을 다룬 이 영화 속에서

영화의 상당부분은 문청이 관영, 혹은 관미와 필담을 나누는 장면이 차지한다.

정치적 이유로 친지들의 신변에 다급하고 험한 일들이 일어나고 

문청이 운영하는 사진관에서는 수시로 시국에 대한 토론이 급박하게 이루어지곤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문청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 날도 역시

뒷그림처럼 있는 문청에게 관미가 쪽지에 글을 써서 대화를 시도한다.

관미는 문청에게 음악을 틀어달라고 요청을 한다.

독일 전설을 담은 '로렐라이'라는 음악이다. 관미는 문청에게 이 음악에 관련된 전설을 알려준다.

방안을 가득 채운 흥분한 젊은이들과 그들의 시끄러운 토론, 음식 속에서

방안 한 구석, 로렐라이의 음악소리와 그 둘의 고요한 대화만이 방안과 영화를 가득 채운다.

마치, '작은 방안에 둘이서만 들어간 것 같이' 설레고도 관능적인 장면이다.

 

영화 속,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문청과 그런 그를 좋아하는 관미 사이의 소통의 방식은 전혀 답답하지 않다.

결핍으로 인한 그들만의 고유한 소통법은

감정과 주장의 과잉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히려 안전하고 안정된 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이 된다.. 





소통,

내가 당신에게 말을 걸고, 당신이 그 말의 끝을 잡아주는 유쾌한 놀이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맑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에서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마종기, <전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말을 걸고 싶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소통을 넘어 내통하고 싶어 달달 안달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죽음의 반댓말은 호기심이라고한다.

권태는 더는 알고 싶은 것이 없는 상태이고

사랑의 끝은 더 이상 당신에 대한 질문이 없어진 상태이다.

'이제야 가까스로 당신에 대해 궁금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라는 표현은 관계의 끝에 헌정하는 조화로 된 장미 한 송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 간의 거리가 훌쩍 멀어졌다.

마스크가 가린 것은 겨우 입과 코이지만 심리적 두께와 거리는 그보다 몇 배이다.


당신과의 대화의 행위는 소리의 전달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 코에 닿을만큼 기울어진 나의 마음은

당신의 표정에 호응하는 나의 입술선의 움직임과 콧등 위의 작은 주름의 술렁임과 

눈동자의 나풀거림과 눈썹의 간섭으로 온통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방식이 무엇이든,

아무도 없는 당신의 방에 혼자 울리는 전화벨소리든,

그것이 행여 침묵이든,

소통은

소란한 소음의 방 안에서도 필담으로 꾹꾹 눌러 쓴

문청과 관미의 글자처럼 생명과 관계의 살아있음의 황홀한 흔적이다.


하여튼

얼른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당신의 호흡까지, 비말까지 흠뻑 호흡하는 소통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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