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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아님 말고



박찬욱감독 집의 가훈은 '아님 말고'라고 한다.

여유와 유연함이 교만의 수준에 이를정도로 과하게 느껴지는 멋진 모토이다.


한 때 내가 즐겨쓰는 말 역시 '유연하게, 유쾌하게'였다.

뻐시게 나가봤자 아차, 싶을 때 퇴로가 막혀 개쪽팔릴 수 있다.

노화의 첫번째 증상이 똥고집이고 대학교수 한 명 설득해서 서울 데리고 가기보다 소 100마리가 더 쉽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나뭇가지를 얽어 만든 섭다리처럼 낭창낭창한 사고와 태도는

뇌에 새싹이 푸릇푸릇하다는 말랑함과 말 붙여볼 만한 틈을 구비한 접근용이도 상위지수의 상태이다.  


고 노무현대통령의 종교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세례까지 받은 천주교인이었는데 종교활동에 열심을 내지 않고 있었다.

김수환추기경이 '하느님을 믿는냐?'고 물었고 노무현은 '희미하게 믿는다.'고 답했다.

'확실하게 믿는냐?'고 재차 묻자 그는 고개를 떨구더니

'앞으로 프로필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사상이나 신념이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은 흔하다.

확실히 이데올로기는 피보다 진하다.

순교자나 미전향장기수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 속 주인공  루드비크는

농담처럼 던진 한 마디가 사상논쟁에 휘말려 15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하지만 출옥 후 복수가 물거품이 되는 이유는 그를 파멸로 이끈 사상논쟁이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박물관의 박제전시물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삶을 송두리째 세밀하게 간섭하는 사상이라는 것이 영원불변의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전 15:19)


조동아리로는 누구 못지 않은 독실한 기독교인인 나는

가끔, 내가 믿는 진리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허망한 것으로 드러나는 악몽을 꾸곤한다.

절대적 신념이기에 악몽을 넘어 패닉일 수 밖에 없을 일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종교단체 신천지가 최고로 핫한 이슈의 중심에 있다.

기독교에 대한 이단의 무리라고해서 그들이 공격받고 있는 것이 고소한 것은 결코 아니다. 

타인들이 쓰레기로 취급하는 신념을 붙들고 있는 또 다른 타인에 대한 슬픔이 있을 뿐이다.

종류와 농도만 다를 뿐

자신이 모시고 사는 가치의 견고함에 대해 완벽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아님 말고,의 배짱은 대단한 것이고

우리 모두의 종교는 '방황'이어야 옳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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