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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을 몇 권 사서 읽고 있다.
찾고 있는 책마다 절판된 것들이라 어쩔 수 없이
인터넷 중고서점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헌 책은 새 책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
배송비와 맞 먹는 룰루랄라 싼 가격의 기분 좋음 말고도
책의 주인이었던 낯선 누군가와 잠시 만나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간혹 만나는 밑줄이나 간지에 적어 놓은 몇 줄의 친필은
만난 적도, 만날 일도 없는, 익명의 존재와
어긋난 시간 속에서 어긋나게 스치는 느낌이기도하다.
-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헌 책에 남겨진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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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만에 처음 통화를 했다.
유난히 잠금 장치가 복잡해 열 때마다 진땀이 났던 그 집의 현관문,
아파트 두 채를 개조한 까닭에 유난히 길었던 앞 베란다, 그 곳의 고요하고 따뜻했던 햇살
향긋한 거실의 냄새,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귀국하여 지방대학 법대 부교수가 되어 있었다.
이세련.
세련이는 내가 대학 2학년 때 몰래바이트(과외)로 만나 3년을 알고 지낸 아이였다.
발레를 전공한 교수였던 엄마의 극성으로 중3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연락이 끊겼었다.
비음이 섞인 목소리, 말끝에 어리광이 묻어 있는 말투까지도 똑 같았다.
종이를 접은 듯, 시간의 처음과 끝이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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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 홍균이의 여자 친구는 글을 쓰는 아이라고 한다.
조용하고 요란스럽지 않은 여자애라고 했다.
연극하는 남자에 글쓰는 여자,
집도 없이 어쩌면 평생 캠핑카나 타고 살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길래
'오, 환상적이다, 시에미도 한번씩 태워줘라~' 예약해뒀다.
그 밤, 둘째 재형이는 내내 말이 없었다.
3년 정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내가 아파버렸다.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사람들,
스쳐지나가는 풍경들.
나풀거리는 화사한 꽃 무늬 플레어스커트가
봄날, 문지방에 살짝 물리기도 하고
다시 잡아당겨 빼내기도 하고...
모두가 우리의 삶의 소롯길을 지나치는 행인들이다.
나무처럼 서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