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초의 커닝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음악 시험이었다.
영어 알파벳만 겨우 익히고 입학한 중학교에서 영어 스펠링 못지않게 어려웠던 것은
음악의 빠르기말과 셈여림의 철자였다.
라르고, 안단테, 알레그레토, 피아니시모, 모데라토...
한국말로도 어려운 그것들의 철자를 외우는 것은 당시의 나의 능력에는 벅찬 요구였다.
쪽지를 만들어서 필통에 넣었다.
감독교사의 눈을 피해 살짝 벌려놓은 필통 속의 반짝이는 정답을
주관식 괄호 안에 채워 넣는 것은
닭장에서 사나운 수탉의 눈을 피해 아직 따끈한 달걀을 훔쳐내는 것처럼
땀나는 떨림과 함께 짜릿한 쾌감이 동반되는 묘한 경험이었다.
어찌나 강력하고 통 큰 이력이었는지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손이 잘린다는 진실의 입과도 같았던 필통의 아가리의 실루엣과
유난히 이물스러웠던 교실의 햇살과 고요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싸우다 정든 것마냥, 혹은 그날의 죄의식을 배상이라도 하듯
그 이후 음악 용어에 대하여는 나름 통달하여
새로 출시되는 자동차의 이름에 소나타나 프레스토 따위의 익숙한 용어들이 나올라치면
'칸타빌레나 모데라토라는 차가 곧 나오겠는데..., ' 따위의 잘난 체를 살짝 흘리기도 했다.
이런 악연으로 시작된 음악 용어에 대한 관심은
도달하기 힘든 분야에 대한 경외와
예술적 풍미가 가득한 이탈리아어의 어감에 대한 편애에서 비롯된 듯도 하다.
돌체(dolce): 부드럽고 부드럽게
안단테(andante): 걸음걸이처럼 느긋하게
콘부리오(con brio): 활기차고 생기있게
칸타빌레(cantabile): 노래하듯이
포코 아 포코(poco a poco) 조금씩 서서히....
수많은 음악 용어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녀석은 보통 빠르기인 '모데라토(moderato)'이다.
안단테와 알레그로 사이의 템포에 해당된다.
largo-adagio-andante-andantino-moderato-allegretto-allegro-vivace-presto
느리고 좋은 여행, 참 좋은 여행사 '라르고'나
속도에 있어서 동급최고임을 강조한 오래전 현대자동차의 신차 '프레스토'처럼
느림의 미학이나 빠름의 능력,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중뿔난 매력이 없는 맹맹한 빠르기말이다.
하지만 메트로놈 속도의 평균값이 되기도 하고 모든 빠르기말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가장 평범하고 평이하여 안정적이다.
특별하지 않아서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새털같이 흔한 날, '보통의 하루' 같은 형용사이다.
모데라토는 영어 단어 'moderate'와 어원을 같이 한다.
moderate optimism(지나치지 않은 현실적 낙관주의),
a moderate sorrow(절제된 슬픔) 등의 표현에서처럼
'적당한'이란 뜻 말고도 '온화한, 절제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지 않고, 소리가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으면서...
절제와 신중함, 지혜를 갖춘 빠르기!"
-《클래식을 읽는 시간》, 김지현, 더퀘스트, 46쪽. 2025.-
인생의 시기별로 때로는 피아니시모의 목소리로 살기도 하고
돌체의 심상을 추구하기도 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크레센도의 언덕길을 비바체의 눈길로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도 몰라 욕망의 도돌이표 앞에 벅찬 설렘으로 서던 젊은 날도 있었다.
삶은 결국 정답표가 뜯겨나간 수련장임을 확인하고
고요히 자신의 속도의 운율로 아템포, 본디의 빠르기로 돌아오기도 한다.
남아 있는 모든 욕망마저 다 닳고 해질 머지않은 날에는
걸음걸이처럼 느긋한 안단테에 마음을 둘지 모르겠지만
내려놓을 수밖에 없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그것보다는
내 안의 힘과 능력과 근육을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조율하며
발휘하며
아껴가며
사용할 수 있는 'moderate(모데라토)'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좋아하고 싶다.
내 작은 필통 속에 오래도록 훔쳐볼 수 있는 커닝페이퍼로 간직하고 싶다.
커닝페이퍼에 하나 더 넣을 수 있다면, '쉼표' 하나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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