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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소리소문

 

드디어 오늘 갔다 왔다.

 

삼 년 전, 제주에서 보름 살기를 할 때 방문했다가

휴무일이라서 닫힌 창문 앞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서야 했던 

그 서점, <소리소문>에 오늘 다녀왔다.

'작은 마을의 작은 글들'이라는 의미의 이름답게

소박하면서도 깊은 정감이 깃든 공간이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의 서점 150에 선정되었다는 인터넷상의 명성답게

애써서 찾아가야만 만나볼 수 있는 한적한 시골의 마당이 있는 개성 넘치는 서점,

<소리소문>에서 책 두 권을 샀다.

서점 주인의 감성과 깊이가 묻어있는 책 추천의 쪽지들이 곳곳에 붙어있어서

사고 싶은 책들이 수북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두 권만 골랐다.

 

얼마 전 감명 깊게 봤던 일본의 애니메이션 《룩백》의 원본 만화책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바로 골랐다.

나머지 한 권은 그 서점의 시그니처, 바로 블라인드 북. 

그곳만의 독특함이 묻어있는 판매방법이었는데 한편에 블라인드북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서점지기가 포장의 겉면에 몇 줄 적어놓은 그 책의 특징만 보고 책을 고르는 구매방식이다. 

 

# 꼬옥 안아주고 싶은 당신에게

# 등을 토닥이는 듯한 문장

# 누군가 그리울 때

# 새벽의 단편영화 같은 책

 

내가 고른 책의 표지에 적힌 내용이다.

 '30대 초반의 감성 위주의 젊은 여성 작가'의 위험이 살짝 느껴졌지만

'새벽의 단편영화 같은 책'에 승부를 걸었다. 

숙소에 와서 포장을 벗겨 살짝 책장을 넘겨보니

낯선 제목에, 깨알만 한 글씨에, 성도 붙이지 않은 이름만으로 이루어진 낯선 이름의 작가의 책이었다.

앞의 세 개의 #에 걸린 문구의 독성에 나의 약점이 감염당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지만

나의 취향을 전혀 모르는 생판 낯선 사람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골라준 단편영화를 한 편 보는 느낌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실망이 기대와 설렘으로 살짝 바뀌었다.

 

재미난 것은

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책이 다름 아닌 바로 이런 블라인드 북이라는 사실이다.

구체적인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책을 구매한다는 것이 다소 모험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방문객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로 그 점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엄마는 포레스트 검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단다. 네가 무엇을 고를지 결코 알 수 없지."

포레스트의 인생에 닥칠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의미의 말이다.

 

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만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님이 현실이다.

이도 저도 아닌 맛의 무언가가 나오기도 하고

전혀 먹을 수 없는 것이 나오기도 한다.

지칠 때쯤이면 간혹 가다 다디단 알초콜릿이 손에 잡힐 때도 더러 있다.

도저히 삼킬 수 없을 정도의 쓰디쓴 무언가가 잡힐 때도 부지기수이다. 

고른 것을 먹고서 토악질을 한 날은 없지 않던가.

 

그럼에도 그것은 초콜릿 상자다.

해가 뜨지 않은 흐린 날에도 

'아침이야, 날이 밝았어!'라고 하는 것처럼.

 

감춰져 있기에 매력이 배가되어

복불복이라는 즐거운 도박에 책 한 권의 값을 지불했듯이

알 수 없기에 흥미로운 초콜릿 상자 속에

은밀히 담겨있는 나의 내일과 모레, 그리고 그다음 계절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내 취향이 아닌 게 걸렸다면 타인의 취향의 단편 영화를 한 편 본다고 생각할 수밖에.

자기만 만족하는 괴팍한 취향의 감독이 만든 단편영화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인생은 몇 개의 짧은 힌트만 보고 골라야하는 

블라인드 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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