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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일상으로의 초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커피맛을 기억하고 있다.

몇년 전 롯데백화점 앞 작은 커피숍 <color in coffee>에서 마신, 아마도 라떼 한 잔이었을 것이다.

둘째 아들 재형이와 백화점 쇼핑을 마치고 나오면서 마신 커피이다.

그리고 그 날은 한 달 여정도의 재형이의 입원을 마치고 집에 짐을 갔다놓은 후

처음 즐긴 평온한 일상의 하루였었다.

한 달 남짓 지속된 원인불명의 고열, 임파선 종양검사 후 결과를 기다리던 죽을 것 같던 공포,

식사와 수면이 하찮은 걸림돌일 뿐이던 엉망진창의 날들 속에서

어느 날, 병원의 화장실 창문을 통해서 보이던 주변 아파트에서 새어나오던 일상의 불빛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귤을 까먹으며 보는 티비 연속극, 아침잠을 깨우는 고함소리, 귀찮아서 밀쳐 둔 설거지...

지루하도록 별 볼 일 없는 그런 일상이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축복일 수 있음을.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울 거야
매일 똑같은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내게로 와 줘 내게로 와 줘
해가 저물면 둘이 나란히 지친 몸을 서로에 기대며
그 날의 일과 주변 일들을 얘기하다 조용히 잠들고 싶어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라는 노랫말의 한 부분이다.

격정이나 열망이 결여된 밍밍함이 아니라 낮고 느린 것의 충만함이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그림 작가 grim-b님의 그림처럼 편안하고 다정하다.

잘 마른 빨래에서 나는 햇빛의 향기나 오래 신은 운동화에서 느껴지는 낫낫함처럼.


내내 흠뻑 빠져서 즐겨보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몇 일 전 끝났다.  

남과 북의 에미나이 리정혁과 윤세리의 사랑의 결국이 어찌될까 궁금했는데

일 년에 딱 한 번 재회하여, 스위스에서 가장 행복한 2주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아름다운 스위스의 풍광 아래 둘의 만남은 그림 같았고 둘의 눈에서는 꿀이 떨어졌지만

참, 행복한 사랑이겠네,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궁여지책이었겠지만.

서로의 습관과 일상을 나누지 못하는 열정은 급히 처리해야하는 감정의 빚잔치 이상 뭐가 될까.


뒤집어 던져 놓은 양말을 까고,

코고는 대가리의 베개를 받쳐주고,

꼬부라진 체모를 집어 치워주는

하찮고 지루한 일상의 공유가 그 어떤 고난도의 애정의 테크닉보다

영혼의 올가즘의 기교가 될 수 있다.


온 나라가 코로나19로 인해서 평온한 일상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흉흉한 요즘이다.

개학이 3주나 미루어져서 나름 여유가 있는 듯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의 선택의 폭이 옴팡 줄어들었다.

갈 수 있는 곳, 만날 수 있는 사람, 할 수 있는 일에 금기가 없는

지루하고 하찮은 일상이 벌써 그리워지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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