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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부사

 

 

'당신을 정말사랑합니다'라는 문장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이는

촌스럽거나 순진하거나 다급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리라.

...부사는 싸움 잘하는 친구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는 중학생처럼

과장과 허풍, 거짓말 주위를 알찐거린다.

나는 거짓말을 쓰되 그것이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고심하다 겨우

부사 몇개를 지운다.

- 김애란의 <잊기 좋은 이름>, '부사와 인사' 일부-

 

 

역할이랄지, 비중이라는 말 따위에 아무 관심도 없는 중딩들에게

You look happily. 라는 문장이 어법에 어긋난 이유를 설명하다보면

명사, 형용사, 그리고 부사의 쓰임과 역할을 언급하게 된다.

 

'꽃게탕을 끓인다고 하자.

꽃게는 명사 정도에 해당돼. 핵심이라는 거지.

무우나 바지락은 형용사 쯤?

그럼 부사는 뭐냐... 쑥갓 정도랄까.

야채칸을 뒤져서 다행히 있으면 넣고, 안 넣어도 아무 이상이 없는 향신료 정도야.

없어도 꽃게탕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데에 아무 지장을 안 줘요. 

하지만 넣으면 훨씬 풍미가 돌지.' 

 

 

 

 

 

2-8 교실 칠판 한 구석에 담탱이인 내가 코팅하여 붙여놓은 문구다.

학기초 분위기 최고라는 학과 담임샘들의 칭찬은

짧은 탐색기를 마친 봄의 끝 무렵부터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수업하기 가장 힘든 반이라는 불평들이 쉬는 시간마다 쏟아졌다.

 

30%만 줄이자, 얘들아.

하고 싶은 말, 쫌만 줄이면 훨씬 멋져 보이거든~!!

 

 

 

 

 

 

 

 

20개가 넘는 브라자를 한꺼번에 빨아 널기도 하고

찰 옥수수를 쪄서 시어머님께 가져다드리기도 하고

1400원 주고 다운받아 <기쿠지로의 여름>을 보기도 하고

독립영화관에 가서 <칠드런 액트>를 보고 전율하기도 하고

종일 자다깨다 오전과 오후를 혼동하기도 하고

학교에 가서 <독서캠프> 도우미를 하기도 하며,

 

(아무 것도 안하고 그저 쉬기로 마음 먹은) 여름방학의 일주일을 보냈다.

'알차게 시간 활용하기'라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빈둥거려도 뒹굴뒹굴 행복하다.

정말, 알차게, 잘, 보낸 하루가 아니라 그냥 나의 하루로 괜찮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은 후회만 남던 방학이

마음의 방향을 살짝 틀어보니 오롯이 풍성하다.

 

알록 달록 물감으로 채색한 그림이 아니라

연필 하나로 스케치한 그림처럼 건조하지만 담백하다.

'정말'을 빼고 엽서에 써 보낸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처럼.

 

하고 싶은 말의 130%를 뱉어내야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우리 2-8 아이들도

어느날엔가는

꽃게탕이나 부사, happily를 떠올리며

웃자란 가지들을 잘라줌으로써 오롯한 모양새의 멋을 알아갈 어른의 날이 올것이다.

'거짓말을 쓰되 그것이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고심하다 겨우 부사 며 개를 지워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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