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영어 어감이 좋아서 마음이 가는 달(month)이 두 개 있다.
에이프릴과 줄라이가 그것이다.
2음절에 강세를 넣어서 읽을 때의 '줄라이'의 어감은
푸른 숲 속, 나만 아는 작은 시내, 그 속 맑고 풍성한 물풀 위를 미끄럼을 타는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이다.
오늘은 그 미끄럼의 첫 슬라이딩 날이다.
예전,
운전하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그때 상대방의 동행인 여리여리한 여자가 앙칼지게 편을 들어 같이 싸워주는 모습을 보며
무척 섹시하고 멋있게 보였다는 어떤 이의 경험담을 들으며 멋짐의 이유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들며 공감이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어떤 식이든 편파적인 자기 편에 대한 갈망을 얘기했던 듯하다.
언젠가 자신의 책 서문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시인 김민정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삶의 어느 법정에 서건 나는 그녀를 위해 변호를 할 것이다'라는 표현을 했다.
오랜 동료이자 친구에 대해 보내는 신뢰와 애정에 이만한 표현보다 나은 게 있겠는가 싶었다.
그것을 읽으며 속절없이 눈물이 흘렀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기대했던 관계들이 결국은 나만의 순진한 착각들이었음을 회상한 까닭이었다.
내게는
'동산촌'이라는 모임이 있다.
사실은 모임의 이름도 명확하지 않고, 정기적인 모임의 규칙도 없고, 구성원의 범위도 모호하기는 하다.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대학마저 같은 그야말로 '불알친구'( 아뿔사, 나는 불알이 없는데 이 표현을 대체할 게 생각이 안 난다ㅠㅠ)들 예닐곱명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우리 고향 동산촌의 동산성당을 같이 다녔던
요셉, 분도, 아나스탸샤 셋의 끈끈한 우정 사이에 몇몇이 추가되어 같이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모임이다.
아나스타샤 경숙이가 영입을 해 준 덕에 나도 그들 틈에 끼게 되어 없는 붕알을 달랑거리며 놀게 된지 30년이 가깝게 되었다.
남, 여가 섞여있으나 무덤덤하리만큼 탈 날 것 없는 관계들이다.
섬진강변으로 자전거여행도 가고,
나의 남편이 뉴질랜드 연수를 떠났을 때는 몰래 이박삼일 제주도 여행도 가고
백여리에 새로 집을 지은 요셉이네 앞 마당에서 별구경도 하고...
어제는 송천동으로 이사를 한, 경숙이네 집들이를 했다.
농민운동으로 평생을 고되게 살아 온 분도는
우리 문재인 정부의 눈에 들어 겁나게 출세하여 얼굴보기 힘든 중에도
내려와 같이 술잔을 기울였고
맨날 안 아픈 곳이 없는 영신이는 역시 여전히 어디가 아프네 아프네 시끄럽게 앵앵거리는 중에도 장수에서 기어와 줬고
폐차장을 하는 연오는 땡볕에 그을려 시꺼먼 얼굴에 모자만 하나 눌러 쓰고 왔다.
송천동 먹자골목 왁자한 이자카야에서 배불리 고기와 쐬주를 먹으며
나도 김민정이의 신형철처럼
이 들 중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어느 법정에서라도 그를 위해 띠엄띠엄 말도 안되는 진술이라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혀 꼬부라진 주사처럼 머릿 속을 잠깐 스쳤다.
혹시나 그럴 만큼의 강단이 없다면
적어도 남은 나날들 속에서 삶이 주는 여간한 업앤 다운의 부침 속에서 묵직한 위로대신
우루루 몰려가 뜨거운 어묵국물 호호 불어가며 근심의 무게 나눠가지며
같이 슬라이딩 슬라이딩하며 살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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