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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생각보다 짧은 여행



선영(先瑩)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밭이 친정동네 가까이에 있다. 

월드컵 경기장을 바라보는 동네, 반월리의 가장자리 야산,

우리들은 어린시절 그곳을 '평재'라 불렀었다.

돌이켜보니 그야말로 낮은 구릉, 정도의 뜻이다.

비교적 기다란 밭의 끄트머리에는 푸른 박공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묘지가 있다.

총각도사 내 친구 요셉이는 우리 친정 갠숙들이 그나마 촌동네 출신치고

다들, 하다못해 촌구석 면서기 일지언정 국가의 봉록을 먹으며 살아가는 축복의 이유로

평재에 묘를 잘 쓴 덕이란 얘기를 한 적도 있다. 



지난 주 엄마를 만나고 오는 길,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하루키가 야쿠르트 스왈로즈 야구구장에서 갑자기, 느닷없이 '나도 소설가가 되어야겠다' 결심한 날의

놀라운 에피파니처럼, 정말 느닷없이,

평재로 들어서는 작은 소롯길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20여년 만의 일이다.

 

 

뚜렷한 이유도 없다.

가족들 모두 성묘차 가는 추석에는 정씨 집안의 큰 며느리라는 핑계를 끌어 와

오후 느지막 즈음에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걸로 일갈해 왔고

평소에는 친정 구성원 누구보다도 엄마에게 최상의 돌봄을 기울인다는 이유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소홀을 나 스스로 합리화해 온 게 전부였다.

20여년 만이라고는 해도 결혼 후 방문 횟수를 다 합해봤자

고작 두 세번을 넘기지 않는 까닭에

평재에 대한 기억은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달구지 바퀴가 만들어 놓은 가장자리만 움푹 패였던 흙길은 시멘트 포장길로 바뀌었고

길 아래 낭떠러지처럼 낮았던 논두렁들은 간간이 농기계 수리 센터나 과일보관창고로 바뀌었지만

누구네 산소, 누구네 포도밭들로 이어지는 길의 곡선이나

이미 쇠어버린 삐비꽃이나 뱀이 눈에 띌까 고개를 들고 달리던 유년의 숲길은 자주 출몰하는 여전한 꿈속의 그 길 그대로였다.


<나니아 연대기>의 벽장문을 밀치고 신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흥분처럼

기억 속의 그 길을 따라 가며 확인하는 그 짧은 시간은 벅찬 기쁨이고 황홀이었다.

마지막 페이지가 나올까 두려워하며 아껴 넘기는 그림책을 손에 든 아이처럼.


꼭지 근방이 툭툭 불거진 이마무라가 최고의 배라던 정숙이 아버지의 배과수원을 지나

큰 올케 언니의 입덧에 속수무책이던 큰 오빠가 어느 새벽

잎사귀도 따지 않은 푸른 자두를 비료푸대 가득 훔쳐 따 왔던 기완이 아저씨네 자두 과수원 옆, 우리 밭에는

그 동네 바지런한 누군가의 손길로 이랑마다 풋고추가 나래비나래비 이쁘게 자라고 있었다.

그 밭 끝의 산소, 그리고 우리 아버지...


내게 남겨진 우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어둡고 차갑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까닭에 날 것으로 남겨진 그분에 대한 기억은 

내가 어른이 되어가며 마땅히 거쳐야만 했을 윤색과 채색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병상에 계시면서 집안 구석구석 남겨 준 절망의 음조나

국민학생으로서 처음 접한 가족의 죽음의 무게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지점이고 기억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분이 이 세상을 떠난 나이를 훌쩍 넘은 나이의 내게 여전히

그리운 이름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차에서 내려, 멀찍이서

고추밭 가랑이 너머로 잡풀 더미 속에 숨어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나는 그 시절 아버지를 어떤 톤으로 불렀었던가, 기억이 안 난다.



집으로 돌아와 늦게 귀가 한 남편에게 오늘의 방문에 대해 짧게 얘기했고

남편은 '잘했네'라는 말 이외는 다행히 사족을 달지 않았다.

티비에서는 유시민의 새 책을 소개하고 있었고, 그가 쓴 여행서의 서문 속의

'인생은 생각보다 짧은 여행'이라는 말을 아나운서가 덧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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