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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산수유가 피면

 

 

나쓰메 소세키는 영어문장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영어 수업 도중에 학생이 'I love you'를 '나는 너를 사랑한다'로 번역했는데

"일본인이 그런 말을 입에 담겠는가. '달이 아름답네요' 정도로 옮겨 두게. 그걸로도 전해질 걸세."

라고 말하여 정정해 주었다는 일화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은 'I see you'라는 표현으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를 대신한다고 한다.

 

산수유가 피는 계절이다.

선혜의 브라자 같은 하얀 목련도,

담벼락을 무너뜨릴듯 똥개 같은 생명력과 옹골찬 빛깔로 봄을 온통 덮어먹는 샛노란 색의 개나리도,

팝콘처럼 세상을 일시에 화사하게 만드는 벚꽃도

새로운 계절을 치장해주는 봄꽃들이지만

내게 봄은, 산수유의 계절이다.

 

겨울의 찬 기운이 스멀스멀 꽁무니를 감추고

먼저 돋아난 냉이들이 꽃을 피우며 쇠어갈 때쯤,

요망스러운 이름의 연보라색 개불알꽃이 양지쪽에 갓난아기 새끼손톱처럼 돋아날 때쯤,

에취 에취 환절기 비염에 눈알이 빨개질 때쯤,

산수유가 핀다.

 

신학기의 아늑한 피곤함과 긴장이 봄볕으로 달궈진 자동차 안의 온기로 놀놀해지는 삼월 중순의 어느 날

퇴근 시간 무렵, 옆 짝꿍 동료와 처음 갔던 지리산 아래 산동 마을의 산수유 군락지가

내게는 처음 만난 산수유였다.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서울년 같은 수선화의 새초롬함과 

너무나 쉽게 펄렁펄렁 치마를 까발려주는 읍내 순정다방 레지 땡땡 가라 은하 같은

개나리의 물큰한 다정함의 

가운데 어디쯤에 있는 그 노란색을 산수유는 가지고 있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儉而不陋華而不侈)고나 할까.

 

그 이후

여럿이도 갔고

둘이도 갔고

혼자서도 갔지만

지리산 아래 산동마을의 아무렇게나 자란 고목진 산수유 군락의 연한 노란빛은

매번

새봄이 주는 이름 모를 아늑한 긴장과 기대,

나이가 들어도 어쩌지 못하는 대상 없는 설렘이 여전히 내 안에 간.간.이. 있음을

발그레 확인시켜 주곤 해서 다정하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얗게 밤을 새우며 하얀 이가 홍니가 되도록 

밤새 산수유 열매를 깠던 산동 마을 옛 처녀들처럼

내 마음도 노랗게, 붉게 물이 든다.

 

내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산수유가 피었어요'이다. 

 

 

 

 

홍니

​                                      .안도현.

지리산 아래

구례 산동 마을 처녀들 중에는

홍니를 가진 이가 많았다고 한다

눈 내리는 겨우내 누룩 냄새 나는 방 안에서

산수유 열매를 몇 날 며칠 까면서

이빨에 그만 붉은 물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눈 내리는 날이면 지리산 아래

구례 산동 마을 옛 처녀들 보고 싶어진다

누구를 기다리며 그 밤을 하얗게 지샜냐고,

그이는 산 넘어 돌아왔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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