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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나도 그려

 

 

 

좋아는 하지만 잘하지는 못하는 것들이 있다.

내게는 그 중의 하나가 골프이다.

필드에 나가면 그럭저럭 90대 초반이나 용쓰면 80대 후반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덩치가 작다보니 그야말로 '따복따복' 스타일의 골프가 되어

드라이버나 우드 등의 긴 클럽은 약하고 웻지에서 승부를 보는 소심한 골퍼인 셈이다.

 

겨울을 지나며 바쁜 일상에 쫓겨 연습장도 게을리 가다 보니

그나마 짧은 비거리가 대폭 줄어 연습장 갈 때마다 짜증만 쌓이고 있다.

 

'저 여자는 개근상 줘야겄어. 근데 출석률만 높으면 뭐 하냐. 참 징하게 안느네.'

아는 체도 제대로 안 하고 지내는 연습장의 앞 뒤 파트너가 속으로 까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차츰차츰 뒷줄 타석을 이용하고 있는 요즘이다.

피치까지는 그럭저럭 하는데 7번 아이언부터는 어처구니없이 거리가 짧아져서

뒷 타석의 사람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골프 가방 옆의 의자에 클럽의 커버를 놓고 하는데 7번 아이언을 연습할 때는 

슬그머니 커버를 가방으로 덮어놓는다. 

마치 피치나 9번 채를 연습하고 있는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이다.

 

사실, 골프 연습장에서의 짧은 비거리를 숨기기 위한 촌스러운 개수작과는 달리

나는 너무 쉽게 나의 패를 까발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인생에서 피해야 할 것 중의 하나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을 자기 입으로 발설하지 않기'라는 

품격 있는 팁을 누군가가 말해줬을 때 아차, 싶었었다. 진즉 알았어야 했는데.

예전 안철수 씨가 대통령 후보연설회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에게 까진 입술로 던진 첫 질문이

'제가 MB 아바타입니까?'였었다.

그 이후 대선 기간 내내 그의 별명은 MB 아바타가 되었었다. 

물론 대선에서 죽사발을 쑨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나 역시 직장 생활 초반기에 입에 달고 다니는 몇 가지 표현이 있었다.

 

'제가 좀 엄벙하잖아요. 건성나발이에요.'

'알죠? 제 별명이 털팽이인 거?'

 

행여 저지를 실수나 드러날 부족함을 이해받기 위한 일종의 엄살이고 밑밥이라 생각하고 했던 말이었다.

겸손과 솔직함을 덮어먹을 게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것들이 나의 이미지와 프레임으로 굳어져 갈 수 있다는 계산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따위 하위 모럴을 덮어먹고도 남는 노련한 스킬들이 넘친다는 것을 알게 된 요즘도 

여전히 나의 약점을 쉽게 쉽게 노출하며 살고 있다.

 

'정기 건강검진을 했는데 공복혈당이 높다고 나왔네. 108 이래.'

'우리 아들은 30대 후반대로 가는데 장가를 안가네. 이 눔이 이렇게 속 썩일 줄은 몰랐네.'

 

알고 보니 점심 식사 후 죽어라고 운동장 걷기를 하는 교무실의 친한 동료는 

나보다 훨씬 높은 혈당에 고혈압까지 있었지만 나의 걱정에 위로도, 동조도 생략한 채 미소만 짓고 있었다.

장가 안 가는 나의 아들놈 걱정을 듣던 교회 점심의 앞자리 권사님 역시

알고 보니 40대 초입의 총각 아들을 두고 있었지만 아귀찜 속 콩나물만 뒤적거리며 아작아작 먹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 잃을 게 적어지는 약삭빠른 품격이 삶의 요령이 된 사람들 속에서

별 것 아닌 약점을 기꺼이 노출함으로써 그 허점의 틈바구니에서 동병상련과 따듯함을 나누고 싶은

인간적인 접근이 나의 삶의 요령인척 포장도 해본다.

 

솔직함은 과묵함의 벽 앞에서 입방정이 되고

과묵함은 솔직함의 벽 앞에서 음흉함이 된다.

 

노출된 나의 부족에 그 어떤 위로보다도 촌시런 어투로 툭 던지는 한 마디가 나를 부축해 주기도 한다.

 

'나도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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