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긴장과 압박감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사무실에는 다섯 개의 서랍이 달린 오른손잡이용 받침대 책상이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 받은 우편물은 가장 밑에 있는 서랍에 두고 어제의 우편물은 다시 꺼내 그 위에 있는 서랍으로 옮기면서 일을 했다.
아버지는 가장 위 서랍까지 올라와야만 우편물을 열어봤다.
그 시간까지 사람들이 편지로 쓴 문제의 절반은 그럭저럭 해결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편지가 도착하자마자 읽어야 할 만큼 절박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파커 J.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글항아리, 116. 117, 2022년-
새벽 3시쯤에 잠에서 깰 때가 더러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혹스러운 시간이다.
밤으로부터도, 아침으로부터도 멀다.
현실로부터도, 꿈으로부터도 멀다.
핑계라도 달듯 급하지도 않은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 와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잠 속으로 몸을 웅크려 밀어 넣어보려 낑낑대지만 그러기에는 정신이 너무 쌩쌩하다.
문제는 그때부터이다. 온갖 근심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기 시작한다.
새벽의 생각이란 마녀의 속치마같아서 앞 뒤도 없이 걷잡을 수 없이 펄럭여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한 번 구를 때마다 몸피가 서너 배로 불어나는 눈사람처럼 차츰차츰 침소봉대되어 펄럭이기 시작한다.
손님이 지난 주만 못하다고 슬쩍 흘린 재형이의 말은 매 달 대출금도 갚지 못하여 파산하는 파국으로 치닫고
체중 조절이 쉽지 않다던 홍균이는 심혈관 질환이 고질병으로 자리잡고
여행계획을 모두 나에게만 맡긴 남편은 무용지물, 귀찮게만 하는 애물단지이고
나의 잦은 잔기침은 폐암의 전조증상이고...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좋은 것은 나쁘고, 나쁜 것은 좋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맥베스의 앞에 나타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흘려
그로 하여금 망상에 사로잡히게 했던 광야의 마녀들의 소리처럼
생각은 상상이 되고 상상은 망상이 되어 나의 영혼은 끈끈이주걱에 잡힌 파리가 되고 만다.
결국 거실로 나가 티브이를 켠다.
밤의 검은 손아귀에서 놓여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드라마나 영화보다는 마음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프로그램이나 홈쇼핑이 좋다.
냉동실에 넣어두고 먹으면 쫄깃함이 그대로 보존된다는 창억떡을 사기도 하고
호텔에 납품하고 있다는 양념된 LA 갈비 몇 팩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어 아침을 맞는다.
그리고 그 아침의 빛깔은 불면의 밤중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Present fears are less than horrible imaginings.”(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이 현실보다 더 끔찍하다.)
그 옛날의 스코틀랜드의 맥베스는 이렇게 말했고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 봐.
존나 용감해질 수 있어.”
몇 년 전의 유지태는 《올드 보이》에서 더 적나라하게 말했다.
노년의 삶을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삶'이라고 표현했던 파커 파머는
우편물을 서랍에 보관하는 아버지의 독특한 방법을 통해서 걱정의 부질없음을 표현했다.
우리를 고뇌케 하는 대부분의 걱정들은 급하게 당겨 쓰는 가불(假拂)이다.
그날이 와도 갚지 않아도 되는 입도선매일 뿐이다.
행여, 그 날이 와서 갚아야만 할 채무라 한들 어쩌겠는가.
삶은 유한하고
그 유한의 가장자리에서 그저 맞닥뜨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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