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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브라자는 반달표

 

 

 

방학을 맞아 모처럼 E마트에 들렀다.

반찬거리와 몇 가지 과일 외에도 라면을 끓일 때 사용하는 편수냄비와 세일을 하고 있는 굴비도 한 두릅 샀다.

거실 티비 옆에 놓을 작은 화초를 사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가 계획에 없던 속옷을 한 세트 샀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마지막으로 먹거리 코너에서 닭강정을 주문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선생님!" 하며 인사를 했다.

내가 수업에 들어가는 학급의 한 학생이었다.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영어 실력 또한 월등하여 각별히 가깝게 지내는 윤결이라는 아이였다.

반가워서 활짝 웃으며 다가가려다 흠칫,

순간 표정을 축소시키며 손만 가볍게 비밀스럽게 흔들어주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한 걸음 떨어져 있던 엄마를 부르며 나를 소개하려 하는 그 아이의 제스처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 윤결이 어머님이세요? 우리 윤결이 너무 이뻐요. 공부도 잘하고 수업 태도도 좋고.

고등학교 가면 완전 끝내줄 거예요.'

라며 호들갑을 떨 수도 있었건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사실은 있었던 것이다.

 

닭강정 코너에서 얼핏 본 윤결이의 엄마는 사실은 잠시 전 2층에서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화초 코너 옆에 임시로 마련되어 있는 매대에는 브랜드도 낯선 여성 속옷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나는 저렴한 가격의 속옷을 뒤적이며 나의 사이즈를 골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상 매대가 아닌 임시 매대의 균일가 물건을 살 때의 K-아줌마스러운 바쁜 손놀림과

다소 겸손한 각도의 눈빛이며 상기된 얼굴빛 사이로 얼핏 본

바로 옆 정상매대의 한 여성을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닭강정 코너에서 맞닥트린 윤결이의 엄마가 바로 비비안 코너에서

브래이저의 박음질과 탄성을 각별하게도 꼼꼼히 체크하던 바로 그 아줌마였던 것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너희 영어선생님이셔? 하루도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는 법이 없다는 그 멋쟁이 선생님?

아이고, 근데 얘, 어쩌니, 속옷은 싸디 싼 것 사시더라, 얘.'

카트를 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딸과 나눴음직한 대화가 이명처럼 귓가에 웅웅거렸다.

당장이라도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다시 반품하고 싶었다.

아,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미 나는 싸디 싼 속옷을 입는 겉만 번지르르한 여자가 되고 말았으니. 

 

오래전에 읽었던 이순원의 장편 소설 《스물셋, 마흔여섯》속의 여 주인공 순영의 일화가 생각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상경하여 공장에 다니고 있던 순영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고향 오빠 승호를 만나 

마음을 나누다가 처음 동침할 기회가 온다.

그러나 그날 순영은 사랑하는 승호 오빠와의 동침을 완강히 거부하는데

이유는 다름 아닌 그날 입고 온 속옷이 너무 낡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그 이후 그 둘의 관계는 흐지부지 되고 만다.

 

그날 나는 E마트의 순영이가 되고 만 느낌이었다.

 

며칠 후

홈쇼핑 광고를 보다가 망설임 없이 바로 주문버튼을 눌렀다.

예전부터 살까, 말까 망설이던 제법 고가의 속옷 세트를 할인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스가 풍성하고 은은한 파스텔톤의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 5개의 비닐을 벗기고 있는 나에게

'겉옷 위에다 입어. 아깝잖아. 안 보이는 게.'

'존 놈 좀 한 번 사줘 봐라, 제발! 이눔의 할인, 균일가 좀 벗어나고 싶다!'

 

낱낱이 포장을 벗기고 텍을 떼어 줄 맞춰 장롱 속옷 코너에 정돈해 놓으니

모든 게 갖춰진 느낌이 들었다.

윤결이 엄마에게도 보여 줄 수 없고

보여줄 승호 오빠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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