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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 1. 아무렇지 않지 않았나 봅니다.

 

피부과 문을 밀고 나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이게 내 눈에서 나오는 내 눈물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서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내 마음이 작동하여 만들어낸 것이 아닌 것 같은 눈물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마자 이마트 앞에 있는 K피부과를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너무 유명한 병원인지라 기다리는 시간이 기본 두 시간이라는 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치료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지 오래되었기에 가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피부 알레르기,

20여 년 전부터 시작되어 고요하게 나를 억누르고 있는 성가신 가시다.

햇빛 알레르기로 처음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햇빛만이 아닌 향기, 진드기, 한약재 등 다양한 인자들이 그 원인이 되어 견딜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해 왔다.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명의들을 찾아 치료를 받아봤지만 그때뿐,

남은 것은 포기와 허탈, 그리고 어디에도 드러낼 수 없을만치 검은 색소침착이 남겨진 나의 목과 눈두덩이!

파운데이션을 치덕치덕 목에다 발라대고

삼복더위 여름에도 스카프를 둘러대고

화장을 지운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여행을 피하게 된 게 

어느 결에 자연스럽게 굳어진 나만의 루틴이 되었다.

 

불편한 게 사실이다. 

속상하지 않을 리 없다. 

 

더 이상의 새로운 병원순례를 포기했었지만

최근 들어 부쩍 증상이 심해져 목의 뒷부분뿐만 아니라 얼굴 가까이까지 가려움이 번져가고 있어

큰맘 먹고 방학을 핑계 대며 찾아가 두 시간을 기다려 만난  K피부과의 의사는 

허탈감만을 다시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 알레르기라는 게 별 다른 치료법이 없어요. 

원인이 되는 것을 열심히 피하는 수밖에.'

 

그리고

병원문을 나서는데

그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던 것이다.

내가 흘리는 눈물이 아닌 것 같은 나의 눈물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세월을 지나왔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았나 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보다.

 

 

-한강, <서시> 일부-

 

 

# 2.  아무렇지 않습니다.

 

슬기로운 간병생활 중이다.

시어머님이 암수술을 받으셔서 간병을 하고 있다.

남편의 바통을 이어받아 간병보호자가 된 지 5일이 되었다.

국립 암센터인지라 전국의 암환자들이 모여든 까닭에 

이곳에서는 가장 가벼운 질병도 암이다.

 

관념적으로만 느끼고 있던 죽음이란 것이

점차 형체를 갖춘 현실로 촉각화된다.

누구나 죽는다,라는 말이

나도 머지않아 죽는다,로 사실적으로 감각된다.  

 

목에 키스를 할 때도 빨대가 필요할 만큼

시꺼멓게 된 색소침착, 나의 지병 피부 알레르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살아있음이 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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