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으로 국수를 먹었다.
중인리 가는 길에 있다는 청국장집에 가서 저녁을 해결하자던 남편은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그냥 집에서 국수를 끓여 먹자고 했다.
"국수가 쉬운 줄 알아?"
멸치 육수만 내어서 간단히 해 먹자는 남편의 말에 짜증 한 스푼 흘리며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뜨거운 물에 급하게 표고버섯이 불려지는 동안 애호박과 당근을 볶았다.
계란지단은 째를 한 번 내어볼까.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여 지단을 부쳤다.
분리된 흰자는 끈기가 부족해 지단으로 부쳐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불의 세기조절에 노련함이 필요하다.
반면에 노른자는 밀도가 높아 모양이 나오려면 생각보다 양이 많이 필요하다.
넓은 접시에 준비한 고명을 담아놓고, 진하게 우린 육수도 준비했다.
이젠 양념간장을 만들 차례,
양조간장과 국간장을 3:2로 섞은 베이스에 쫑쫑 썬 실파, 빻은 마늘, 깨소금에
참기름 두 방울로 화룡정점 한 양념장까지 만들면 이제는 마지막으로 국수만 삶으면 된다.
삶아지는 국수에 찬물을 끼얹어 면발을 깜짝깜짝 놀라게 해 주는 일을 서너 번 반복해야
쫄깃거림이 탱글탱글 살아난다.
맛있네, 맛있네, 를 연발하며 남편은 남겨둔 사리까지 다 해치우며
퇴직하고 잔치국수집 열어도 되겠다는 너스레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호로록 댔다.
가루 것(food made with flour)을 싫어하는 나도 한 사발을 비웠다.
우습게도 국수라는 음식에 대한 나만의 독특한 의미부여가 있다.
'이래야 이거지.'라는 사회 속 암묵적 인정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랄까.
이를테면 뉴욕을 갔다와야 진정한 미국 여행이지, 라든가
혹은 문학사상이라는 출판사를 통한 등단이어야 진정한 시인이지, 따위와도 같은
분명히 편견임에도 불구하고 반박하기 뭣한 인식과도 같은.
그것이 내게는 국수에 관하여도 있다는 것이다.
휴일 낮잠을 늘어지게 자던 남편이 엉덩이를 긁으며 일어나
'점심은 간단히 국수나 끓여 먹을까?'라고 귀찮게 할 때
역시 귀찮아 죽겠다는 듯 '국수가 쉬운 줄 알아?' 한 마디 쏘아주고
호다닥 맛나게 국수 한 사발을 차려낼 수 있어야,
그
때
에
야
그. 럴. 줄. 알. 아. 야.
진짜각시인것같은말도안되는편견말이다. 다른 어떤 음식보다도 말이다.
어디에서 유래한 근거없는 생각인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방학 첫날이다.
코로나님 덕분에 갑자기 방학이 하루 당겨져서 덤으로 생겨난 하루다.
덤으로 얻은 것은 막, 막 써야 맛나다.
막 쓴 하루의 문이 닫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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