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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지난번 커트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기억하시죠? 그때처럼 해주세요."

"아, 그래요? 똑 같이 되려나 모르겠네요.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우리 집에서 한참이나 먼 곳에 위치한 미용실 '헤어 모디컬'의 단골이 된 이유는

미묘한 가위질 하나로 O와 X가 나뉘는,

귀밑에서 뒤통수로 이어지는 머리카락의 라인을 잘 살려주는 주인 여자의 손길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라는 말의 여운이 어쩐지 다소 불길하더니 커트 후의 내 머리는 별로였다.

 

 

 

삼천변의 해지는 풍경

 

 

몇 년 전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바둑 대국에서 인간 이세돌은 알파고에게 4:1로 대파당했다.

"바둑은 둘이 만들어 가는 예술 작품이라고 배웠다. 더 이상은 그게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배 후 몸무게가 7kg이나 빠졌다는 그가 한 말이다.

 

논리적 알고리즘 외에 그 어떤 요소도 개입되지 않기에 모든 상황에서 정확한 수를 찾아내는 알파고를 상대로

'인간'이라는 최대의 약점을 가진 인간이 그나마 1승이라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우주 밖 외계행성의 무적의 군대와의 사투 끝에 따낸 신승이었다.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초능력이라는 갑옷과 갑옷의 사이 눈꼽만한 틈을 통해,  

'비인간적'이라는 치명적 약점의 신체부위에  비수를 꽂아 얻어낸 승리였다.

 

반면에 2017년에 있었던 인간번역사와  AI 번역사의 대결에서는 다행히도 인간번역사가 승리를 했다고 한다. 

문학‧비문학 지문의 한영‧영한 번역 대결 결과, 한영 번역에서 인간 번역사 팀은 30점 만점에 평균 24점을 받은 반면,

번역기는 겨우 평균 11점이었다고한다. 또 영한 번역에서도 번역사들은 평균 25점을 받았지만, 번역기는 13점에 그쳤다. 

 

기계는 기계다웠고 인간은 인간다웠다.

 

햇살 좋은 나무 사이로 많이 걷기

고요에 잠겨 묵직한 책을 읽기

좋은 벗들과 좋은 말을 나누기

 

-박노해의 시,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법-

 

요즘 나는 길을 잃었다.

숲이 늪 같고, 늪이 숲 같은 날들이다.

 

진퇴양난,  커다란 두 개의 바위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는 작은 새가 되었다.

연두 잎사귀 무성한 숲 속을 걷는 일이나

고요한 시간 속에 앉아있는 일 등,

시인이 제시한 다시 꿋꿋하게 살아가는 법도 별 효과가 없다.

시간이 흘러가 모든 게 무디어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내 삶에서 손에 꼽을 만한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인간적이고 싶은 나의 바램이 

오랫동안 다정했던 사람들에게

행여 더 비인간적인 모습이 되지 않을까 

어두운 얼굴로 서성이며 또 서성이고 있다.   

 

사람으로 사는 일의 따스함을 가득 담은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라는 말로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내 앞의 강물이 지금은 너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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