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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환대

 

힘겨웠던 시절들을 떠올려본다면

특정한 사건이나 시점으로 기억되기보다는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없었던

불안하고도 경직된 나의 눈빛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자신의 작은 두 팔로 스스로를 안아보는 신파조차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몸짓에서 느껴지는 냉랭함과 앙상함은

물리적 상황이 주는 절망스러움보다도 훨씬 회복불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지켜주고 싶지 않은 황량함.

스스로를 긍휼히 여길 수 없고, 자신을 아름답게 볼 수 없는 비관보다 더 힘겨운 일이 또 있을까.

마음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상태이다. No Through Way.

 

스스로 위로하고(自慰) 안아줄 용기가 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의 여지가 있다는 증거이다.

마치 육체적 자위행위가 삶을 향한 원초적 의지에의 증거이기도 하듯.

 

한동안 즐겨봤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났다.

'추앙'으로 시작된 드라마는 '환대'라는 단어로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아침에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

 

정신이 맑으면 지나간 사람들이 몰려와서 맨 정신으로 살기 어렵다고

술 마시는 이유를 털어놓는 구 씨에게 염미정이 하는 말이다.

구 씨에게 추앙을 요구했던 염미정은 자신이 먼저 구씨를 향해

“조언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하며 응원하는 "

추앙의 과정을 겪으며 차츰 해방을 향해 나아간다. 

 

구씨 역시 염미정을 향한 따스한 시선의 스펙트럼을 통과하며

자기 파괴적인 삶에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추앙은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환대하게 될 뿐만 아니라 끝까지 예의 없으면서도 끝까지 예의를 지키기를 요구하는 싸가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호의를 베푸는 환대로 확장한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이르면

내내 무표정하고 방어적이던 염미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하고 생기가 넘친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나 미쳤나 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맞다.

가장 최고의 환대는 호의적인 이웃을 향한 것도,

적의의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는 원수를 향한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수용과 화해가 어쩌면 환대의 최종 목표점이고,

비로소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해방에 이른 것이다.

 

거울 속의 요즘의 나는 이쁘다.

적지 않은 불안과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적요로운 편안함이 있다.

이 적막하고 건조하지만 견고한 이 평화가 참 좋다.  

참 좋다.

 

미쳤나 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대신

아이구, 기미 좀 봐라. 쳐진 저 눈탱이는 어쩔것여! 가 대신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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