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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약간 놀란 듯했지만 웃으면서 유쾌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원한다면 그냥 여기 있어.”
“내가 방해되지 않겠어?”
“전혀. 나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낯설어서 들어온 거야.”
“나도 그래. 나 때문에 다른 데로 가지는 마.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소년은 다시 앉아서 구두코를 내려다보았다. 조는 예의 바르게 보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집 근처에 살지 않니?”
“바로 옆집이야.”
소년이 조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를 집에 데려다주었을 때 함께 크리켓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생각하자, 조의 새침한 태도가 너무 우스웠기 때문이다.
조개탄 난로를 가운데에 두고 디귿자로 책상이 배열된 교실 안에는
방학인데도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아이들이 한 반을 이루어 오밀조밀 딱지처럼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그 여자아이는 읽던 책, 《작은 아씨들》을 책상 위에 엎어놓는다.
그리고는 이전 쉬는 시간에 하던 놀이를 계속하기 위해 부리나케 난로 위에 젓가락을 올려놓는다.
달궈진 젓가락에 머리카락을 감았다가 풀자 꼬불꼬불 그럴싸한 머리 모양이 나온다.
책 속의 가장 좋아하는 주인공, 조의 풍성한 머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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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누구야?”
베스는 조의 얼굴을 힐끗 보고 물었다.
조는 갑자기 일어나 앉으며 신문을 내던지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엄숙함과 흥분이 뒤섞인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언니!”
“뭐라고?”
메그는 일감을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아주 잘 썼어.”
에이미는 비평가처럼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알고 있었다고! 아. 정말 자랑스러워.”
베스는 언니를 끌어안고 이 빛나는 성공을 함께 기뻐했다.
조가 보낸 소설 두 편이 신문사 작품 공모에 뽑히는 장면에 환호할 때쯤 점심시간 종이 울린다.
후다닥 도시락을 까먹고 나온 교실 옆 양지바른 공터에서는 수레미 뎅깡이 한창이다.
밀치며 넘어지는 격렬한 활기 속에 소녀도 같이 달린다.
금을 밟았네, 아니네, 죽었네, 살았네, 잠시의 시시비비가 일어났고
그때, 어중이 떠중이 동산촌 촌놈들과는 격이 달라 보이는 하나의 몸짓이 소녀의 눈에 들어온다.
'얘들아,' 부르는 낮은 목소리 뒤에 오른손 검지를 입에 갖다 대는 '쉿' 동작,
그 무게가 만든 잠시의 고요를 틈타 낮고도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시비를 가려주는 모습.
소녀보다 한 학년 어리지만 남도 어딘가에서 전학왔다는 조촌 가구점 집 딸 미경이의 몸짓과
그것이 만들어 낸 고요가 잠시 머물던, 그날의 운동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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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가 열이 내렸어. 편히 자고 있어. 몸에 땀이 나서 피부도 촉촉해지고. 이제 편안하게 숨을 쉬고 있어.
감사합니다! 아, 고마워라.”
소녀들은 의사가 와서 그 사실을 확인해 줄 때까지 그 기쁜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의사는 수수하게 생긴 사람이었지만, 소녀들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인자한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그의 얼굴이 성인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 얘들아. 이 어린아이가 이번에는 헤쳐 나갈 것 같구가. 집안을 조용히 하고 편히 잠자게 해 줘라. 베스가 깨어나면 이것을 먹이고.”
소녀들은 무엇을 먹여야 하는지 하나도 듣지 못했다. 둘 다 살그머니 어두운 홀로 나와서는 계단에 앉아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기쁨으로 서로를 꼭 끌어안았던 것이다.
죽을까 봐 조마조마했던 베스가 병마를 이기고 깨어나는 장면에 안도하며
소녀는 가방을 챙겨 하교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동네 초입에 있는 금자네 집을 지나 정화네 집, 그리고 새마을가게를 넘어서면
곧 열녀의 비석이 있는 정문이 나온다.
그 골목의 끝에 소녀의 집이 있다.
소녀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진다.
그리고 그 집에는 아버지가 누워계신다.
아버지는 복수가 차서 배가 임신한 여자처럼 불러있다.
겨울방학인데도 소녀가 학교의 '방학 독서교실'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가는 이유이다.
소녀는 꼬불꼬불한 머리카락만 하릴없이 잡아당겨본다.
국민학교 동창회 밴드에 6학년 그 시절 사진 콘테스트를 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공고를 올린 남자 동창 아이는 어디서 입수했는지 단체 졸업사진도 올려놨다.
"13세의 은선이는 어땠을까?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냐?"
운동을 마치고 같이 걸어나오는 은선이의 표정은 한껏 싱그러웠다.
같은 연습장을 다니는 친구 은선이는 국민학교 때부터의 오랜 친구이다.
헤어져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검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당겨봤다.
13세의 소녀, 선희.
한 시절 작은 쉼터가 되었던 교실과 그 겨울의 낡은 동화책들,
-소공녀, 올리버 트위스트, 엄마찾아 삼만리, 돌아온 래시, 해저 이만리, 왕자와 거지, 두 도시 이야기...-
오래된 종이냄새와 조개탄 난로의 나른한 온기, 그 안의 조그만 여자 아이.
조(Jo)가 되고 싶었던 나의 한 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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