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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더할 나위 없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디오티마는 에로스의 양면성을 출생 내력으로 설명한다.

신들이 잔치를 열어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에 빈곤의 여신 페니아가 구걸하러 왔다가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풍요의 신 포로스에게서 에로스를 잉태했다고 한다.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가난의 여신 페니아와 풍요의 신 포로스 사이에서 태어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품에서 자랐기 때문에,

결핍된 것을 메우고자 하는 갈망과 함께 이 갈망을 메우기 위한 창조력을 타고났다고 한다.

페니아의 자식인 에로스는 늘 빈곤에 허덕이며 결핍을 느끼면서도,

풍요의 신인 아버지를 닮아 아름답고 선한 것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풍요롭고 생기가 넘치다가도 가난과 무기력에 빠져 허전함으로 몸부림치기도 한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보고만 있어도 또 보고 싶은 감정이 들기도 하고

사랑에 빠져 사리분별을 잃었다가도 지혜롭게 대처하기도 한다.

 

- 이명호 외 지음,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가》, odos출판사, 56, 57쪽- 

 

 

에로스 탄생설화를 통해 사랑이 가지는 양가적 속성이 태생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The rose>라는 팝송에서 노래한

끝나지 않는 고통의 허기(endless aching need)이면서

동시에 꽃(flower)이라는 사랑의 은유는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다.

 

이상은의 노래 <비밀의 화원>에서 보듯

점심을 함께 먹거나,

새로 연 가게에서 민트향의 샴푸를 사는 따위의 아주 흔하고도 단순한 일조차도

다시 태어난 듯, 다시 꿈을 꾸게 된 듯 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나라의 한 영화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사랑의 지극한 행복감을 '죽어도 좋아'라는

다소 외설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감탄사로 드러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왕위마저 포기하기도 하고, 개종도 마다하지 않게 하는 힘,

문학을 비롯한 예술, 학문 등 세상의 아름다움은 사랑이 맺어내는 열매들이다.

 

하지만 사랑의 다른 이름은, 슬픔이고 외로움이다.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함박 웃는 밝음이 아니라 야윈 창백함이 더 사실적일 것이다.

 

에로스의 핏 속에는 풍요의 신 포로스와 함께 가난의 신 페니아의 유전자가 같이 들어있다잖은가. 

포로스의 시간이 저물기도 전에 페니아의 지배력이 뻗어오기 시작한다.

애정의 감미로움은 더 많은 소유와 욕망을 부추겨 하얗게 야윈 결핍을 낳는다.

그래서 사랑은 외로움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박준 시인의 <울음> 전문- 

 

 

마음을 얻고 마음을 주는 일이

검붉게 잘 익은 자두를 베어 물어 과육의 달큰한 액체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 ,

옷소매까지 적시는 일이 되었었다.

적록색맹의 누군가에게 배롱나무 꽃잎의 붉은 아름다움과 4월 신록의 황홀함을 내 마음에 빗대어 설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걸 두려워한다면 춤을 배울 수 없으며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결코 사는 법을 배울 수 없기에

자신은 사랑을 '꽃'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노래 <The rose>는 끝을 맺는다.

 

하지만

오감을 저릿저릿하게 하는 황홀이 없어도

무언가를 무릅쓰는 모험을 구태여 선택하지 않아도 

작은 꽃들은 내 삶에 시시로 피어나고 또 진다.

 

큰 소망이 없기에 느낄 수 있는 이 아침의 고요와 

채움을 기다리지 않는 한적한 외로움과 

시나브로 밀려왔다가 멀어지는 요동조차도 

나의 고요에 대한 위협이 되지 못하는 

이 희망없는 나이 듦이 참 좋다. 

 

더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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