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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지금 딱 필요한 말

 

 

조언이라는 튼실한 말은 무력할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갈림길에서 누군가의 조언이 선택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조언을 구하는 자는 이미 자신의 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지 조언이라는 통로를 거쳐 그 선택에 대한 심리적 뒷받침이나 확신을 더함으로써 자신의 선택에 대한 면죄부를 획득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언제부턴가 이렇게 바뀐 나의 조언의 스타일을 보며 나 스스로 대견해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던진 앙상한 몇 마디 말이 때로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되기도 한다.

급류에 휩쓸려가는 나의 뒷목덜미를 강력하게 낚아채어 구조해 주는 튼튼한 동아줄이 될 때도 있다.

너무 바람직해서 뻔한 말 말고, 너무 반듯해서 생기가 없는 말 말고 

바로 그 시점에 딱! 필요한 말은 따로 있다.

그 열쇠로만 열리는 견고한 자물통처럼.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울음'처럼.

 

야구경기에서 타자가 연속해서 안타나 사사구를 허용하는 등의 볼 컨트롤 난조에 빠져 실점의 위기에 처할 경우,

포수는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에 올라가 투수를 만난다.

등을 두드리거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몇 마디 조언을 해 주고 제 자리로 돌아옴으로써 상대팀의 상승세를 차단하는 시간을 가진다.

배터리라고 불리는 두 파트너가 만나 그 짧은 시간에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눌까.  

볼 배합에 대한 요구나 실점을 막을 실질적인 조언을 해 줄 것이라는 상식적인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대화는 대개는 참 허접한 것들이라고 한다.

'야, 니네 둘째 백일이 언제지?' 또는 ' 오늘 저녁 메뉴는 삼겹살이면 좋겠다, 그치?' 따위의.

그 시점에서는 그게 딱인 것이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투수의 어깨 힘을 풀어줄 수 있는 조언으로 요 따위 대화보다 유용한 게 뭐가 더 있겠는가.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냐.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냐.'

 

오래전 종영된 티브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을 살게 만든 박동훈의 말이다.

 

 

 

 

 

올해 구순을 맞은 엄마가 며칠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눈이 많이 내린 날, 엄마를 태운 주간보호센터 차가 눈 밭에서 넘어진 것이다.

갈비뼈에 실금이 가고 허리에 충격을 받는 부상으로 병원에 계시다가 우리 집으로 퇴원을 하셨다.

큰 부상이 아님에도 연세가 많으신지라 일주일 만에 엄마는 완전히 주저앉아 버린 상태가 된 것이다.

단단히 부축을 해야 겨우 걸으시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식사도 잘 못하시는 중증환자가 되셨다.

고령의 엄마를 혼자 둘 수 없어 막내 오빠가 모시기로 결정하고 새로이 아파트를 구입하여

입주를 코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여서 더 안타까운 일이었다. 

홀로이 잠들고 깨는 스산한 외로움의 긴 세월을 보내시고 겨우 따뜻한 여생을 맞이하나 했는데

이대로 요양병원으로 보내어지나, 하는 생각에 급기야 추스를 수 없는 폭풍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감정에 감정이 소용돌이를 이루어 늦은 밤 베란다를 아무리 서성여도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아 이러다가는 뜬 눈으로 밤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조심스럽게 구십 세면 그래도 섭섭한 연세는 아니니 마음 단단히 가지라는 둥,

요새는 요양병원도 좋은 곳 많다는 둥 나름의 최선의 위로를 건넸지만

내 마음의 언저리에도 닿지 않는 말들이었다.

 

나는 급기야 맞춤 조언을 부탁했다.

 

'있잖아, 나한테 이렇게 말해줘, 빨리.

울 엄마 불쌍하지 않다고, 외롭게 살지 않았다고 말해줘.

그 말 좀 해 줘라. 그 말. 그러면 내가 살 것 같아.'

 

'진짜 그래. 나는 장모님 볼 때마다 부럽더라. 우리 엄마보다 훨씬 행복하신 분이야.

장모님처럼 복 많은 사람이 어딨어. 뭐가 불쌍해. 우리가 그 정도로 효도받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나는 그 밤 잠을 잘 수 있었다. 

'너무나도 안쓰러운 엄마'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 스스로를 탈진케 하는 지나친 애착에서 나온 감정일 수도 있음을

타인의 어휘로 확인받음으로써 비로소 조금 놓여날 수 있었다.

 

그 밤은 그 말이 내게 꼭 필요한 조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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