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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5.6

 

 

2026년 8월에 정년퇴임을 하니

5년 6개월이 남았다.

 

잘해야 본전이고,

티 나게 못하지만 않도록 조심하는 게 이 나이에 이른 직장 생활인의 신조다.

Don't be a shameful person~!

돈 비 쪽팔림~!

 

교장은 나와 동갑이고, 교감은 나보다 세 살 어리다.

닳고 닳은 늙은 여우같은 껄끄러운 존재로 비치기 십상이다.

열심을 내자니 헛심 쓰는 듯 애처롭고

농땡이를 까자니 벌써 뒷방 노인네를 자처하는 꼴 같다.

그러다 보니 교무실 안에서 점점 행동의 제약이 많아진다.

오랜 짬밥으로 눈은 밝아져 자꾸 거슬리는 것이 눈에 잡힌다.

용기인지 배짱인지 모를 입심만 세져서 말발은 거칠어지고

걸핏하면 투덜대고, 자주 삐져있다.

 

처음 학교에 와서 교직원 회의 때마다 일어나서 발언을 하는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연세가 지긋하신 남선생님이셨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하시는 말마다 옳은 말 같았다. 

그 분보다 한참 어린 교장, 교감은 그분의 말에 열심히 동의를 해 주는 듯 보였고

여타의 선생님들은 귀찮은 기색을 숨기며 예의를 다하여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뿐, 그분의 지적이 반영되어 변화가 일어난 적은 기억에 없다.

그분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나잇값을 치렀고

관리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권위 값을 발휘했을 뿐이다.

 

오른쪽 어깨에 검정색 큰 가방을 메고 다니셨던,

안경 너머로 작은 눈이 따글따글하셨던 이상진 샘,

요즘 나는 그분을 자주 생각한다.

여자 이상진이 될까, 두려운 까닭이다.

 

 

 

심심해서 네이년에서 눌러본 MBTI 결과는 사뭇 의외였다.

'호기심 많은 예술가'

 

호기심이 많다는 말도, 예술가라는 말도 나와 맞지 않는 듯하나

내가 누른 답지들의 종합적 결론이니 긍가봉가이다.

 

어쨌든 서둘러서 늙을 필요는 없다.

74세의 배우 윤여정 씨는 자신의 필생의 목표를 '전형성 탈피'라고 말했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트랙에 몸을 얹어 놓고 자동으로 뺑뺑이질 치는 무기력한 삶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나도 그 목표에 한 표다. 

타인의 가치에 의한 평가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안의 뱃심이 필요하겠지만

다행히 뱃심은 아닐지언정 '내 맘대로 룰루랄라의 똘끼'는 좀 있어서 다행이지 싶다.

여전히 혼자 방안에 처박혀 있어도,

스팸 문자 외에 누구 하나 예의 바른 안부 문자 하나 없어도,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충분히 잔잔하게 행복하니 천만다행이다.

 

뭐가 어쨌건, 세상 모든 야구장 중에서도 나는 진구 구장에 앉아 있을 때가 제일 좋다.

1루 쪽 내야석 아니면 우익 외야석, 그 곳에서 잡다한 소리를 듣고 , 잡다한 냄새를 맡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좋다.

불어오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팀이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나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한히 사랑한다.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를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147, 문학동네-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재밌어서'라는 대답 외에 멋진 말이 준비되지 않았던

하루키에 대한 나의 팬심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의 소설 못지않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의 삶의 스타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댄디즘, 그를 표현하는 한 마디이다.

'나는 나로 만족한다.-I'm satisfied with myself' 댄디즘을 한 줄로 표현한 말이다.

당신의 소설에는 왜 그렇게 황당한 설정, 판타지가 많냐, 라는 기자의 질문에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 소설 속에서라도 일어나면 안 되냐고 반문했던 그는

재즈, 고양이, 마라톤, 야구 등 중독 수준의 '겁나 좋아하는 것들'이 참 많은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의 삶의 스타일에 한 표 던지기를 아끼지 않는다.

남들이 뭐라든 내가 겁나 좋아하는 것들이 여전히 있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삶이 아직 남아 있어서 참 잔잔하니 행복하다.

 

5.6

상당히 길게 남아 있는 나의 직장 생활.

그것을 다 마칠지 아니면 도중에 다른 선택을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세월이 지나면

아내와 고양이만을 데리고 지중해의 어느 마을에서 몇 년씩,

미국의 어느 동네에서 몇 년씩 머물며 장편소설을 완성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곤 했던 하루키처럼

나도 먼 이국 땅에서 일 년씩,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제주도의 어느 돌담으로 마당의 경계를 쌓은 시골집에서 오래도록 머물며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지루한 일상을 조곤조곤 즐길 것이다.

요즘은 그 꿈이 내 손을 잡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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