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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딸기

 

 

딸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은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자주 말하다 보니까 좋아하지 않는 걸로 되어버렸다.

말할 필요도 없을만치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움의 꽃, 장미에 대해

'나는 장미 별로야.' 라며 입을 삐죽거리곤 했던 젊은 시절의 내 심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까탈에서 시작된 왜곡된 게걸음이다.

 

사실 딸기처럼 매혹적인 과일도 드물 것이다.

빨빨빨간 과육 위에

앙탈 부리듯, 눈 흘리듯, 톡톡 뿌려진 씨앗,

여간해선 곁을 주지 않는 처녀의 깊은 속살처럼 부드러운 과육의 촉감,

한 입에 쏙 들어가는 손쉬운 크기,

달콤함의 단순함으로는 끝내고 싶지 않다는 듯 간간이 비집고 들어오는 새콤한 맛의 변주.

접시에 담긴 그 탐스러운 자태를 이겨먹을 JPG가 또 있을까

 

하지만

내게 딸기란 이토록 고혹적인 매력의 과일의 느낌이라기보다는

'vulnerable'에 더 가깝다.

 

vulnerable [vΛlnərəbl] 

  • 1. 취약한

  • 2. 영향받기 쉬운

  • 3. 위기의

  • 4. 노출되어 있는

  • 5. 민감한

 

마트에서 사 온 딸기는 그 싱싱함이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상할까 봐 빨리 먹어치워야 하는 조바심이 수반되는 까탈스러운 과일이다.

아끼다가는 X되는 일 흔하다.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먹어야 하는 몇 안 되는 년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 편리함이 독소이다. 수월함이 아니라 까칠함이다.

껍질에 농약이 직살(직접 살포:이런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으나)된 그 년을

흐르는 찬물에 충분히 씻다 보면 그년도 떨고 내 손가락도 떨린다.

 

 

 

귤이 훨씬 낫다.

한 봉다리 사다가 뒷 베란다 세탁기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가

배불리 밥 먹고 밥상머리에서 까먹고, <싱 어게인> 보다가 또 까먹고

낮잠 자다가 일어나서 또 까먹고, 시나브로 까먹다 보면 금세 바닥이 난다.

어떻게 취급해도,

조심스럽게 다루지 아니함에 대한 보복이 없다.

 

 

easygoing [iˈzigouˈiŋ]

  • 1. 느긋한

  • 2. 너그러운

  • 3. 편안한 걸음걸이의

 

매혹적이고 감각적인 면에서

귤이 어찌 딸기를 덮어먹을까, 라는 생각에

딸기년을 좋아한 시절도 없지 않고

딸기년이 되기를 소망한 적도 있지만

한 때였다.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터질까, 깨질까 두려워 뒤꿈치 들고 걸으며,

호호 불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너와 나의 관계가 아니라

아무 곳에나 처박아두어도

꺼내었을 때 다시 그 싱싱함을 포르르 뒤집어쓰고 나오는

낫낫하고도 튼튼한 easygoing의 품격적인 관계에 대한 환상을 나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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