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디네센 원작의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가 있다.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며 사는 네덜란드의 어느 황량한 어촌마을이 배경이다.
음식에 소금 이외의 어떤 맛의 첨가조차 불경한 쾌락이라 여기는 그들에게
파리의 유명 요리사 출신의 바베트라는 여자가 복권에 당첨된 거액의 돈을 다 쏟아부어
마을 사람들에게 지상 최고의 한 끼의 식탁을 제공하는 이야기이다.
"맹세컨대 우리는 음식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소."
"혀는 가장 요사스러운 근육이죠."
초대받은 그들은 음식에 대해서는 일체의 어떤 표현도 하지 않기로 사전에 서로 단단히 약속을 한다.
하지만 난생처음 경험하는 눈과 혀의 즐거움에, 마법에 걸린 듯
서서히 그들의 표정이 달라지고 차츰 흡족한 미소가 번진다.
서로 증오하던 그들은 화해와 사랑의 이야기를 주고받게 된다.
만찬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위로 하늘에서는 총총히 별이 빛난다.
그 별 아래서 그들은 비로소 서로 손을 맞잡고 빙빙 돌아가며 찬송가를 부른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바베트의 만찬은
불경스러움과 타락으로 이끄는 마녀의 식탁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지상의 회복이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인간의 진정한 믿음은 영혼과 육체의 아름다운 조화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혀는 정말 요사스러운 근육이다. 감각은 섬세하고 예민하며 역할은 크다.
먹고, 말하고, 사랑하는 행위에 쓰이는 혀의 용도를 생각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먹는 행위, 식사의 행위는 단순한 식욕 해결의 의미 그 이상이다.
또한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석(同席)의 의미를 넘어
따로 확보한 시간을 공유하며 상대의 세계를 내 경계 안에 허용하는 공감과 회복의 과정이다.
한 때 즐겨봤던 웹툰 《저녁 같이 드실래요?》의 젊은 남녀 주인공 해경과 도희는
생판 모르는 사이로 식당에서 각각 혼밥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된다.
그리고 그 둘은 오직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서만' 가끔 만나는 독특한 관계 설정을 한다.
음식을 씹고 삼킬 때 나는 소리, 식기와 식기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 그리고 식후의 나른한 만족까지
그들이 만나 저녁을 먹는 행위는 그래서 감각적인 설레임의 과정이다.
사랑의 행위의 은유일 수밖에 없다.
식사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 두 청춘이 서로에게 특별한 고유의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영화가 있다.
입 큰 줄리아 로버트가 모든 것이 완벽한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을 찾기 위해
딱, 일 년 신나게 먹고 뜨겁게 기도하고 자유롭게 사랑하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탈리아에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서 뜨겁게 기도하고,
발리에서 자유롭게 사랑하는 경험을 통해 그녀가 얻는 행복.
이 세 가지 행위는 우리를 '다시 살리는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동의어로 묶을 수 있다.
먹다는 동사는 사랑하다는 동사로 치환이 가능하고
그것은 놀랍게도 기도하다는 가장 성스러운 행위와도 층위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생각보다 허술하다.
어떤 약속도, 믿음도 서로에게 보증이 될 수 없는 마음의 정처 없음 속에서
그나마 '식구'라는 기본적인 연대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숟가락을 섞어 침을 나누며
'같이 밥을 먹는'
내가 너를 받아들이는 오래된 생명의 원시적 습관이 있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코로나가 발병한 지 만 일 년이 되었다.
누그러지지 않는 확산속도를 잡기 위해 거리두기를 강화함에 따라 생활 속 불편함은 물론이고
당연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울의 정도도 비례하여 심각해지고 있다.
의례적으로 나누었던 말, '밥 한 번 먹자'도 쉽게 꺼내놓지 못하는 인사가 되었다.
눈 내리던 겨울밤, 객주가 문칸방에 옹기종기 앉아 먹던 과메기며
서신동 곰 갈빗집에서 먹던 도톰한 돼지갈비에 소주 한 잔,
상떼주르에서 마감시간이 될 때까지 수다 떨며 먹던 시금치 파스타며 와인 한 잔..
아,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내 다정한 사람들과 같이 거나하게 삶을 섞어가며
같이 밥 먹고 싶다.
총총 빛나는 별 빛 아래 손을 맞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