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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꽃비얌 나올라

 

 

 

시험 마지막 날,

큰 아들 홍균이랑 한옥마을을 어슬렁거렸다.

 

 

입구에 개망초꽃이 수북한

74-11에서 파스타와 돈까스도 먹고

통로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차우차우와 사진도 찍었다.

 

꼬치집에서 순한맛 문어꼬치도 사먹고

유명하다는 만두집에서 저녁식사 때움용으로 만두도 포장했다.

 

블로그를 통해

'나만 일방적으로 친한' 황용운 목사님의 <지숨갤러리>에 가서

한지로 인화한 엽서도 몇 장 샀다.

경기전을 들어갈까하다가 입장료가 삼천원이나 되어서

그 돈으로 커피나 사먹자고 발을 돌렸다.

 

'정원을 들여다놓은 집'이라는 컨셉의 커피숍에 가서

아메리카노와 달달한 카페라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걱정이 많은 까닭에 묻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어렵게 먼 거리에서 어쩌다 한번씩 겨우 겨우 오는 그에게

항상 불편한 질문은 늘상 피하고 싶은 주제였었다.

아직도 부드럽기 한이 없는 손가락들을 만지작거리며 티비를 보거나

밤 늦게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19금을 넘나드는 농담을 낄낄거린다거나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사주고 지하 회전초밥집에서 초밥을 먹는다거나..

그렇게 시간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이번 학기부터는 기숙사에서 나오고 싶다,

유난히 자신에게만 연애는 어렵다,

졸업을 1년 늦출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고 싶은 일과 현실 사이에서 좀 답답하다,

 

나도 답답해졌고, 점점 말이 없어져갔다.

 

 

 

 

 

 

 

 

 

 

통 창문을 타고 담쟁이는 뿅뿅 푸르게 담을 탔고

어느 논둑에서는 꽃비얌 가족들이 물기를 말리느라

나래비 누워있을 것 같은

비 개인 오후였다.

 

 

그만 찻집을 나와 햇살 속을 걷다가

악세서리 상점에 들어갔다.

"홍균아, 애인없는 우리끼리 커플링하자"

은반지 두 개를 사서 나눠 끼었다.

 

 

헐값으로 살아갈 수 없는 날들 속에서

겨우 팔천원짜리 은가락지가

삶의 무게를 덜어주지도,

그렇다고 그 무게를 이편에서 저편으로 옮겨줄 리도 없겠지만

좌석을 보장받은 예매권처럼

까닭없이 삶 앞에 문득 당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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