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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나에겐 하이브리드가 있다.

 

 

골프를 좋아한다.

편두통으로 밤을 꼴딱 새우다시피 한 날도

아침 일찍 신경외과에 가서 약을 타와 찐하게 먹은 후 필드에 나갔을 정도니

확실히 좋아하는 것 맞다.

잠이 안 올 때의 지루한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VR이나 가상 시뮬레이션처럼

자주 가는 필드의 첫 홀부터 18홀까지를 상상으로 골프를 치는 것으로 채우기도 하니

말해 뭐하겠는가. 

그리 잘 하는 편은 아니다. 초보를 살짝 벗어났다고나 할까.

컨디션 좋을 때는 80대 후반, 대부분은 90대 초반의 실력이니 골프가 가장 재미있을 타수라고 한다.

덩치가 작다보니 드라이버 거리가 짧은 편이지만

타격에 일관성이 있어 실수가 적다는 게 나의 골프의 장점이라고들 한다.

어쨌든 장타자가 아닌 나같은 골퍼는 세컨드, 써드샷을 잘해야 파포홀에서 투온이 가능하기에

우드를 잘 쳐야만 한다. 

사실 연습장에서 가장 많이 연습하는 클럽도 우드이다.

우드, 내가 너를 정복하고야 말리라. 

하지만 참 까탈스럽고 예민한 클럽이 우드인지라 '18, 18' 나도 모르게 욕이 저절로 나온다.

거리가 짧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얼마전에 다른 각도의 우드를 하나 더 구입했다.

12월에 있는 나의 생일에 생일선물로 사주겠다는 남편을 꼬드겨 선불로 선물을 갈취해 냈다.

하지만 낯선 각도의 클럽을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게 쉽지가 않다.

지랄 맞은 우드, 누가 이기나 보자, 열불 내며 하다 보니 힘이 들어가 더 맞지 않았다.

내일 수능날 학교가 쉬는지라 필드 약속을 잡아놨는데, 이를 어쩌지...

그래, 어쩔 수 없다.

내일은 그냥 우드 대신 하이브리드를 쓰자.

 

 

하이브리드, 모양이 고구마와 비슷하다고 해서 일명 고구마라고도 불리는 클럽이다.

우드의 예민감을 보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클럽으로서 우드의 거리보다는 다소 덜 나가는 단점이 있다.

우드가 최상이지만 맘처럼 잘 맞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거리 손해를 보더라도 사용하게 되는 클럽이다.

sub 우드이다.

불팬에서 연습볼을 던지며 대기하고 있다가 에이스가 컨디션 난조를 보일 때 긴급투입되는 핀치히터이다.

10m정도의 거리 손해를 보게 되지만 클럽의 페이스가 드라이버와 유사하여 실수가 적다. 편하다.

내게 가장 매력적인 클럽의 종류는 우습게도 내게 가장 까칠하고 가장 힘겨운 상대인 우드이다.

만만치 않지만 반드시 정복해야 할 상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클럽은 뭐니뭐니 해도 하이브리드이다.

 

나에겐 하이브리드가 있다. 언덕배기에서도 트러블 샷의 위치에서도 결코 배반하지 않을. 

 

 

아침에 출근하여 의자에 앉자마자 카톡이 하나 왔다.

"선희샘, 눈썹 펜슬을 깜박 잊고 안 가져왔어. 잠깐만 빌려줘."

명관샘의 문자였다. 항상 바쁜 그녀도 나처럼 화장의 마지막 한 부분은 아마도 차 안에서 하는 모양이다.

편지봉투에 펜슬을 넣어서 2층 교무실 그녀의 책상 위에 놓고 왔다.

1교시 수업을 마치고 와보니 나의 펜슬과 구운 계란 두 개가 들어 있는 편지봉투가 다시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선희샘이 있어서 참 좋아.' 

봉투 겉면에 이런 글귀과 함께.

명관샘으로 부터 처음 들어보는 표현이었다. 

 

명관샘은 나와 입사 동기 여교사이다. 그리고 남편이 목사여서 교회 사모님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명관샘보다 착한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무리 남의 험담을 해도 겨우 해 주는 맞장구가 '그런게잉, 왜 그랬디야.' 정도이다.

단둘이 차를 마셔본 적도 없고, 같이 어울려다니며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지만

교직원 여행을 갈 때면 서로가 서로를 룸메이트로 원할 정도로 편하고 낫낫한 상대이다.

슬쩍 흘린 나의 고민을 잊지 않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지금은 어뗘, 괜찮아?' 물어주는 사람이다.

나 역시 아주 오래 전에 아주 적은 돈을 대출받으며 보증을 서 줄 수 있느냐는 그녀의 부탁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 그럼. 얼마든지.'라고 쉽게 응해 준 적도 있다.

 

가장 친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가장 편하고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편한 사람이다. 손 내밀면 언제든지 잡아 줄 사람이다.

골프의 하이브리드 클럽처럼.

나의 부족을 참 많이 들켰는데도 안심이 되는 사람이다. 

그녀가 있어서 참 좋다. 나 역시 그녀에게 표현한 적 한 번도 없지만.

 

나에겐 명관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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