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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쓸모없음의 쓸모

 

 

자신의 칠순 잔치에서 오랜만에 우리 친정엄마인 사부인을 만난

우리 시아버지는 사돈 간의 묘한 힘겨루기의 끝장내기 무기로 

자신의 시집 한권을 꺼내놓고 자랑을 했다.

이에 쌈도 못하는 우리 엄마, 한마디로 시아버지를 KO패 시키셨다.

"그.래.서, 그게 돈이 된다요?"

일평생 뒷짐 진 한량이라는 뒷담화를 딸내미인 나를 통해 들은 적이 있는

우리 엄마, 염치불구하고 회심의 강펀치를 날린 것이다.

당연히 우리 시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 하시고 겸연쩍은 웃음을 소주에 털어넣으시기만했고

순간 얼굴이 빨개진 사람은 나였다. 우리 엄마 왜 저러신대, 저럴 분이 아닌데... 

 

얼마 전 우리 집 옆을 흐르는 아름다운 하천,

삼천에 포클레인 소리 요란을 떨며 강변 정비를 시작했다.

몇 년 묵은 버드나무들을 베어냈고 하천의 중간중간에 섬처럼 있는 억새밭을 없앴다.

대신 그 자리는 시멘트로 단정하게 정비한 화단을 만들어

색색깔의 꽃들을 줄 세워 심어놨다.

초봄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연한 새순이 돋아나는 버드나무 가지의 형상은

오래된 하천의 자연스러움과 다정함이 넘쳤었다.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는 하천의 군데군데 몽글몽글 억새군락은 또 얼마나 가슴 벅찼던가.

대보름 즈음 그것들을 베어 산처럼 쌓아 축제처럼 하던 액막이 불놀이도 장관이었었다.

하지만 정돈과 질서, 실용과 전시행정에 밀려 

쓸모없는 것의 쓸모없음으로 처리되고 만 것이다.

 

실용적 쓸모에 있어서 그다지 효용이 풍성하지 않은 나는

쓸모없는 것들에 항상 마음이 간다.

그것들이 있어서 세상은 조금 더 푹신 거리지 않던가.

 

이 아침 쓸모없는 것들의 작은 이름들을 적어본다.

 

너무 많이 열렸다는 이유로

솎아 낸 풋자두알들

 

아물어 가는 생채기의

가려움 같은 초승달

 

자고 나면 나아질 거야

토닥이던 할머니의 쪼글쪼글 덧없는 거짓말

 

꽃을 밟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다가 부딪친

순한 눈빛의 용서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문득 생각이 나서

잠시 눈을 감아보는 눈꺼풀 위의 고요

 

그리고 

돈 한 번 벌어본 적 없는 

우리 시아버지의 얇디얇은 시 집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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