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거나 말거나
어렸을 때 엄마 심부름으로 '뇌신'을 사러 동화약국에 가곤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 약의 용도는 편두통 치료제였다.
"이 썩을눔의 것이 또 왔네."
하얀색 이불 홑청의 가장자리를 둘둘 말아 머리를 높게 하고
한쪽 머리를 움켜쥐고서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강력한 DNA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게도 편두통이라는 지병이 있다.
진짜 썩을눔의 편두통이다.
딱따구리가 날카로운 부리로 나무를 쪼듯,
혹은 전기기술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규칙적으로 전기를 머리에 흘려 넣어 전기고문을 하듯
머리의 한 쪽 부분에 움찔움찔하는 통증의 발작을 일으킨다.
꼼짝 못하고 항복, 항복을 하고 만다.
원인을 알기에 치료법도 알고 있다. 알지만 쉽지 않다.
신경 쓸 일이 산적해 있을 때,
해결이 쉽지 않은 일들이 나래비 줄 서 있을 때,
긴장하고 불안한 마음을 어찌 몸이 그새 눈치를 채고 '긴장성 근육통인' 편두통의 모양새로 나타나는 것이다.
느긋하게 마음을 먹으면 낫는다.
그것은 예방법이기도 하다.
일이 해결이 되거나 말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let it be, carpe diem, 하쿠나마타타, 내려놓음, 심리적 거리두기, 해탈...
에두르고 포장하고 남의 나라 말을 빌려오고, 또 은유를 동원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모두 같은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가을이 욱씬욱씬 깊어가고 있다.
좋다.
참 좋다.
2. 구라 반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모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다.
세상이 전쟁중인데 무슨 수상 인터뷰냐며 한사코 거절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나도 그녀처럼 가을 나뭇잎 같은 미소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해마다 사던 습관에 의해 처음 접한
그녀의 그 해 수상작 '몽고 반점'이 내가 읽은 그녀의 처음 작품이다.
상당히 야한 설정의 스토리 전개를 사용하여
단편 속에 응축된 이야기와 이미지가 무척 매력 있고 세련되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이후 맨부커상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를 사서 읽었지만
이미 읽었던 '몽고 반점'의 시리즈물이었기에
내가 읽은 그녀의 작품의 수는 겨우 한 권이라는 게 사실이다.
야매, 후루꾸 작가를 자처하는 내가
자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겨우 한 개(한 권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읽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두려워
출근하자마자 학교 도서관에서 《소년이 온다》을 대출했다.
책의 장정도 책의 일부라는 이론하에 커버를 절대 싸지 않는 습관과는 달리
'이제야 이 책을 읽는다'라는 사실을 노출하고 싶지 않아 달력 한 장을 뜯어 호다닥 책 커버를 쌌다.
"들어봉게 그 책은 눈물없이는 못 읽는다데, 시상으나."
"정말 그래요. 권사님. 마음 아픈 이야기예요."
같이 차를 타고 교회를 다니는 윤권사님이 나의 차 뒷좌석에서 광주이야기를 다룬 그 소설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나는 마치 이미 오래전에 읽은 척을 했다.
"선희야, 너는 이미 다 읽었지?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도 읽었거든. 이야기들이 대체로 어둡잖아."
"맞아, 어두워. 너 그것 알아? 악뮤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노래를 듣고 영감을 얻어서 책 제목을 그렇게 정했대."
은선이와 골프를 치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도 표가 날똥말똥 애매하게 슬쩍 넘어갔다.
한강은 상을 탔고
나는 구라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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