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영부영 눈인사만 하고 마네."
"어떤 새끼?"
"13층 김석영이란 놈."
한 때 우리집 필수품 중의 하나는 강력 섬유탈취제 페브리즈였다.
해성고 가는 길에 있는 홍어집 <삼천궁>의 방 하나를 빌려 밤새도록 포커를 하고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온 남편의 옷에서는 삭은 홍어 냄새와 밤새도록 피워 댄 담배 쩌든 냄새가 배어
거의 페브리즈 한 통을 다 뿌려 앞 베란다에 창문을 열고 며칠을 걸어 놓아야만 했다.
잡기에 능하다기보다는 나름 도박성이 강하고 투기에 흥미가 깊어
장례식장이 되었든 삼천궁이 되었든 마련된 자리는 빠지는 일이 없었다.
누워서 하는 것 중 가장 즐거운 것이 ㅅㅅ(사색)이고
서서 하는 것 중에서 가장 행복한 것이 골프이며
앉아서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재미난 것이 노름이라는 속세의 진리를
적어도 3분의 2 이상은 몸소 체험하는 삶이라고나 할까.
'묻고 떠블로 가.'
무릎이 아파오면 초저녁에서 새벽까지 이어지는 승부에서 이미 지고 들어간다는 포커판에서
밤새도록 양반다리를 해도 아무 이상이 없는 노름에 최적화된 관절과
우루사와 박카스를 복용해 가며 한 판 한 판 집중된 정신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곤조가 곧 돈'인 세계에서 나름의 승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경상도에 짝귀가 있었고 전라도에 아귀가 있었다면 전주시 완산구에는 정고니가 있는 셈이었다.
로컬 타짜라고나 할까. 전주의 평경장이라고 하면 너무 나갔나? 아수라발발타~
'그만 좀 하고 다녀.'
아침이 밝아온 후에야 죄인처럼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와 대충 옷만 갈아입고
학교로 출근하는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 하지만 더 이상의 심기를 건드리는 잔소리를
이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일종의 암묵적 공생이 이루어지고 있던 까닭이었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홍어냄새를 풍기고 들어 온 남편은
미세한 죄의식과 제발 이 전리품으로 용서를 해 달라는 애원이 뒤섞인 듯
어금니만 빼고 모든 치아를 다 보여주는 희번덕한 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맡에 역시 홍어냄새가 잔뜩 밴 만 원짜리 돈을 수북하게, 자랑스럽게 놓곤 했다.
금홍이가 몸을 팔아 벌어 온 돈으로 담배도 사고 술도 사 먹던 이상처럼
나는 그 홍어냄새나는 돈으로 옷도 사 입고 고기도 사 먹고 때로 감사헌금도 냈었다.
호구: 그렇지! 노름이 뭐야?
정마담: 파도요.
호구: 그래, 파도! 올라갔으면 내려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거야.
파도와도 같다는 노름판에서 승률 80% 이상이라고 내게 자랑하곤 하던 그의 말을 다 믿은 것은 아니지만
'노름을 해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라는 실전에서 터득한 그의 나름의 철학만큼은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한 그의 뒷담화를 통해
상대적으로 그 판에서 나름 젠틀한 선수다움과 후지지 않은 매너,
그러면서도 쉽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깡치도 인정받았음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판에서만큼은 그는 패킹오더(pecking order)의 서열의 우위를 확실히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천만다행인지, 아쉽게도인지 (fortunately or unfortunately...)
오래지 않아 그는 삼천궁의 정규멤버에서 자진 탈퇴했다.
나의 기도 덕분인지(아뿔싸, 내가 뭐라고 기도를 해부렀나...)
그는 개과천선하여 손을 씻게 되었다.
죽마고우(죽도록 마주 앉아 고스톱 치는 친구)였던 김태균 교장선생이나 정영춘 선생이
한 번씩 전화를 해서 객원멤버로 참여하기를 간청해도 넘어가지 않았다.
평경장의 말을 읊조릴 뿐.
"화투는 슬픈 드라마야...! 아예 모르는 게 약이지."
가끔 값이 나가는 옷을 사고 싶을 때면 홍어 냄새나던 두둑한 팁이 그립기는 하지만
더 이상 페브리즈를 살 일은 없어졌다.
그리고 오늘 만났던
13층의 김석영 씨도 죽마고우 중 한 명이었단다.
안 좋은 패가 손에 들어오면 금세 안색이 변하고
돈을 조금만 잃어도 안절부절못하던 한 참 하급 멤버였던 모양이다.
그 판에서는 먹이를 쪼는 순서가 한 참이나 뒤졌던 그가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고개가 뻣뻣했다는 것이다.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영부영 눈인사만 하고 마네."
"어떤 새끼?"
"13층 김석영이란 놈."
"당연하지. 여기가 삼천궁이야? 판이 달라. 정신 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