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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두런거리는 가을의 말들

 

예를 들면,

교무실에서의 꼴불견 동료 교사 중의 하나는

학생을 혼내고 있는데 그 학생을 상대로 농담이나 장난을 거는 교사이다.

'이게 지금 뭔 짓이여.'

 

수업이 끝난 후 교무실까지 끌고 올 정도의 상황이라면

교실 학생들 앞에서 식식 야단을 치는 전시효과로 성이 풀리지 않은 상태이다.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씩씩 화가 날 때는 수업 도중에 '너 지금 바로 교무실 교감선생님 옆에 가서 서 있어!"

라는 초강수를 두기도 하지만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아니다.

나의 사건을 누구에게 위임한단 말인가, 교감이 나보다 위라는 셀프위상하강을 자초하는 일을 왜 한단 말인가.

그건 하수의 일이다.

초짜는 건방져 보여서 못하고 고수는 불쾌해서 안하고(교감이 벨것이간)

교직 25년 차쯤의 설익은 선생이나 하는 짓이다.

 

어쨌든,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삼보 접고 들어간다고,

교무실에 끌려온 학생은 일단 간이 다소 죽게 된다.

교무실까지 와서 날뛰는 놈은 아예 손을 대지 말아야 할 놈이다.

본전도 못 찾을 짓을 하는 선생들이 아주 가끔 있다. 아예 데리고 오지를 말아야 한다. 

 

하여간,

교사들 앞에서 2차 교육(두 번째 공개 쪽주기)을 위해 교무실 긴 의자에 앉혀놓고 심문을 하고 있을 때

간간이 실실 간섭을 하고 들어오는 선생들이 있다. 이건 순전히 겐세이 けんせい(牽制, kensei)다.

대개 교무실에 끌려오는 학생들은 초범이 아니기에 어쨌든 교사들하고 안면이 있다. 

"또 왔냐?"

"어지간하면 교무실에서는 그만 좀 보자."

까지는 괜찮다.

교육의 효과를 높이는 간섭이고 화난 교사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다.

 

"우리 민규, 또 왔네. 키 많이 컸다잉~."

"너, 나 알지? 내가 니 형 담임이었어."

뭐 하자는 건가. 이건 아니다. 대놓고 바람빼기이다.

손을 문 강아지 흥분을 식히려 간식을 던져주는 꼴이다.

교육이고 쪽 주기고 간에 김샜다.

 

 

 

 

공감이란 감정의 온도와 채도를 조절하여 비슷하게 맞추는 것이다.

책상을 발로 차는 그의 지랄에 가끔은 나도 발로 의자를 찰 정도의 라포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또 때로는

말을 생략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 고요의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웃음소리를 줄이기도 하고 

웃기지도 않는데 폭소를 만들어 터뜨리기도 한다.

 

당신의 마음 표면의 결과 같게 하기 위해

체를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다독이기도 한다.

요란하든

고요하든

같은 우주 속 마음의 파장은 전달되기 때문이다.

 

어렵게 찾아온 가을이라 더 알록달록하다.

오늘은 말을 반으로 줄이고 싶다.

두런거리는 가을의 말들에 고요로 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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