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제비꽃을 좋아하세요?"
이 삼일 간격으로 열흘 넘게 치과치료를 받던 마지막 날, 치과 의자에 길게 누워 입을 벌리고 있는 나에게 의사가 던진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제가 제비꽃을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아세요?
저를 아세요?"
국민학교 2학년 어느 날 국어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특별히 좋아하는 꽃이 있는 사람 손 들어봐요.'라는 말씀을 하셨다.
맨 앞 줄에 앉아있던 나는 손을 번쩍 들었고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순간,
손을 든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순간 후회를 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제비꽃요...'라고 대답을 했었다.
5월이 되어 줄을 지어 학교에서 멀지 않은 야산으로 봄 소풍을 갔다.
점심을 먹고 보물찾기까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줄을 서는데
우리 반에 김진우라는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 반만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진우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흙까지 묻은 채로 제비꽃이 한 뭉치 들려있었다.
치과 의자에 누워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의사 가운에 새겨져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김.진.우.
60여 년 전의 어느 5월, 나에게 줄 제비꽃을 캐기 위해 야산을 헤매다가 지각을 했던 그 아이가
이젠 할머니가 된 나를 빙그레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전 라디오를 듣다가 우연히 듣게 된 '제비꽃'이라는 제목의
한 애청자의 사연이 하도 따스해서 아직도 그 줄거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오늘 아침,
출근하기 위해 자동차에 시동을 걸다가 운전석 앞 계기판 앞에 뭔가가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시들어서 조그맣게 쪼그라든 붉은 열매 두 개.
뱀딸기 두 개였다.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지난주 토요일 건지산을 산책하다가 길섶에서 붉고 탐스럽게 익은 뱀딸기를 발견한 내가
'이리 와서 봐봐. 얼마나 이쁜지.
어렸을 때 나는 뱀딸기를 볼 때마다 미안했어.
이렇게 탐스럽고 이쁜 것에 왜 흉측한 이름을 붙여줬을까 해서.'
하며 남편과 쭈그리고 앉아서 한 참을 바라봤었다.
그리고 일요일과 월요일을 보내며 좀 힘겨운 일들이 겹쳐서 일어났다.
담임을 맡고 있는 학급 안에 학교폭력이 발생했고
한 부모가 담임인 내게 원망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있었다.
또 새로 파스타 가게를 개업한 둘째 재형이의 가게에서 주말 오후 설거지를 도와주며
목격한 아들의 고생은 엄마로서 마음 아픈 일이었다.
크고 작은 걱정거리는 밤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며 어마어마한 크기로 부풀어올라
거의 나의 숨구멍을 옥죄어 와
밤을 거의 뜬 눈으로 보냈고 과민해진 탓에 쉴 새 없이 화장실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물기가 빠져서 쪼그라든, 하지만 붉은빛이 선명한 뱀딸기 두 개를 운전대 아래 계기판에서 발견한 것이다.
재형이 고생하는 것, 너무 힘겨운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엄마 자신 탓으로 돌리며 미안해하는 것 아들에게도 건강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다독여줬던 남편이
어느 결에 따다가 올려놨는지 여전히 선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흙까지 묻은 채로 한 뭉치 뽑아왔던 어린 소년의 제비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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