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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예민하면,

 

잠 속으로 빠져들어보려 내내 뒤척이다가 에라이, 이불을 박차고 거실로 나왔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두시란 섬닷하기 그지없는 시간이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따위의 지적 멋 부림을 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불면의 어두움에 고분고분 호의적이지 않다.

통 놈으로 흡족하게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고요하기도 하고 넉넉하기도 한 시간이지만

사실은 '해야할 일(잠자기)을 하지 못하고 있는' 그저 처치곤란한 시간일 따름이다.

 

리모컨의 버튼을 위아래로 눌러가며 프로그램을 뒤적거리다가 사극 <연인>에서 멈췄다.

병자호란이라는 난리통 속에서 사랑하는 남녀가 겪는 부침을 극적으로 그린 드라마다.

형광등도 다 끄고 티비의 볼륨도 가장 낮게 한 채 이불을 둘러쓰고 소파 위에 쭈그리고 앉아 화면을 보다 보니

참 못난 인간이 하나 눈에 띄었다. 바로 병자호란의 중심에 있었던 조선의 왕, 인조였다.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이는 삼전도의 굴욕의 주인공인 그는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 부부에게도

소인배 짓을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험지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고생을 하고 겨우 귀환한 세자 부부를 경계한 이유는

같이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 사이에서 그 부부가 얻은 신임과 덕망 때문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역모의 힘이 될 것을 우려하여 그들을 죽음에까지 몰아넣었던 것이다.

 

힘을 잃은 자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자존감이 낮아진 자는 쓸데없는 일에 자존심을 건다. 

그래서 예민하면, loser가 된다.

 

주말 동안 불면에 시달렸다.

금요일에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후, 한 두 가지의 내용이 작은 보풀이 되어 마음에서 까슬거리더니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면서 발효되고 부풀어올라 목을 조였다. 

학교에서 맡은 업무의 처리과정에서 협업을 해야 하는 파트너와의 관계 속에서

패스가 되는 느낌을 한 두 번 경험하면서 

배려인지, 무시인지 분간이 애매한 틈바구니에 끼게 된 상황이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표현하자니 과민해 보이고, 넘어가자니 호구 같은 느낌의 구질구질하고 누추한 감정이 내내 마음을 짓눌렀다.

거칠고 강한 어조로 장문의 카톡을 작성했다. 

가시 돋친 어조와 몰아붙이는 흥분의 글귀 속에서 나는 누가 봐도 이미 뻔한 패자가 되고 있었다.

보낼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보내지 않았다. 

월요일에 출근하여 잠시 얘기를 나누며 나의 불쾌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요즘 비로소 가. 끔. 한다.

자기 점검의 문턱에 걸렸다는 얘기이고 자의식이 스멀스멀 도톰해지는 적적한 나이가 되었다는 얘기다.

이 나이쯤이면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처럼 

이미 축적하고 마련해 둔 내 삶의 존엄과 가치가 공감각적으로 스며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이었기에 찬란한 미래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를 연거푸 외치던 젊은 시절에는

가장자리에 레이스를 달지 않아도 삶이 누추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실수나 허점이란 일종의 리듬이고 추임새였다. 오히려 예뻤다.

도약을 위한 잠시의 움츠림이거나 배움의 과정이라고 포장해서 내놓을만한 관용이 통했다.

이제는 그런 시기를 통과하며 구축된 됨됨이와 능력이 개인의 이미지로 굳어진 때가 된 것이다.

품격과 존엄은 속성과 야매로 마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잔치는 끝났고 평점만 남았다. 빼박이다. 

 

어른이 된다는 게 그럴듯함을 마련하는 과정 아니던가.

과민과 호구의 틈바구니에서 불쾌하기 그지없는 감정에 쩔쩔맸던 까닭은

내가 그동안 마련한 그럴듯함이 뽀록이 난 것 같은 도타운 자의식이 발동한 까닭이다.

 

날이 저물수록 고요해지는 것은

쓸쓸함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다만, 덜 부끄럽고 싶기 때문이다.

 

쓸쓸하지 않기 위해서는

둘 중의 하나이다.

자존감을 하늘 끝까지 높이거나

자의식의 촉수를 뭉툭하게 하여

애면글면하지 않거나

 

 

예민하면, lo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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