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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깊은 잠을 겉도는 알람소리

 

 

- 이 모든 게 잘못이라는 생각은 아득히 멀어져 깊은 잠을 겉도는 알람소리 같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한 아내보다 저녁식사를 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의 인생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일을 조금도 막아내지 못했다.

 

 

알랭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라는 책의 한 부분이다.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사랑하는 아내 커스틴을 놔두고 잠시 딴 여자와 외도에 빠진 자신에 대한 묘사이다.

잠시의 딴짓이 그의 인생을 파멸시킬만한 데미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을, 그 때의 무력한 이성의 힘을  '깊은 잠을 겉도는 알람소리' 라고 묘사했다.

 

그것의 유용성이나 가치와는 별개로

조언의 대상자가 처한 상황이나 마음 상태라는 것이

그럴싸한 조언을 흡수하기에는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 

동굴의 상태이거나 환각의 상태일 때가 대부분이다..

 

맹목의 유통기한이 지나야만 동굴에서 몸을 돌려 밖을 바라볼 여지가 생긴다.

중독의 독기가 현타라는 약물로 중화될 때에야 비로소 타인의 소리가 들린다.

대가나 희생이라는 수업료를 지불하는 물리적 입증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알람 버튼을 누르고 깊은 잠을 털어낸다.

 

제정신을 놓을 만큼 무엇인가에 매료되고 

누군가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 있다는 것은 때로 삶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이기도하다.

규칙성과 매너리즘이 예술의 적이듯

인생의 여정에서 좌충우돌과 부침은 풍성한 무늬와 깊은 풍미를 만들어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중독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나이 40에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고(불혹) 말했던 공자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냐고,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다, 라고

실드를 쳐주는 도종환의 위로가 더 현실적이고 다정하다.

 

다만 흔들린 흔적과 상흔이 나머지 삶의 깊은 그림자로 남지만 않으면 말이다.

그 남은 그림자까지도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모르겠어'

 

친구는 폭풍의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달콤하지도 씁쓸하지도 않은 초콜릿을 입에 물고 있는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알람 소리의 볼륨을 높여주는 대신,

 

그녀의 얘기를 마음 기울여 들어주는 일 밖에 없었다.

 

 

 

  - 영화 <그린 파파야향기>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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