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한 유명 정신건강학과 의사가 우울증 치료법으로 산책과 운동 외에
'뒤담화'를 추천했을 때 나는 그의 인간적인 처방에 살짝 동지애를 느꼈다.
점잔 떨며 견디고 담아두지만 말고 감정을 표출하라는 것 아닌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소극적인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보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통계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혼자 있을 땐 티브이를 보고, 둘이 있을 땐 남의 흉을 보고, 셋이 모이면 고스톱을 치고...
한국인들의 보통의 모습이라고 까발려도 욕먹지 않을 면죄부를 획득했으니,
나 역시 뒷담화의 쾌락을 익히 알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뒷담화,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의 흉을 보거나 헐뜯는 일을 이른다.
영어로는 backbiting(back: 뒤, biting: 물어뜯기)이니
어감으로나 의미로나 '뒷담화 하기'보다는 '뒷다마 까기'가 훨씬 적절한 것 같다.
뒷담화 예찬론자로서 엄연히 존재하는 일종의 암묵적 규율을 생각해보자면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고르는 일이다.
아무나 붙잡고 흉을 볼 수는 없다. 그래도 될 것 같은 상대를 골라야 한다.
타인의 흉을 보려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사실은, 사실은... 같이 흉을 봐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의 도마 위의 희생양에 대해 동일한, 적어도 유사한 적대감을 가진 자를 골라야 한다.
입사동기 고선생은 내리 3년을 교무실 짝꿍을 한 사람이고 나무랄 데 없이 나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지만
뒷담화의 상대로는 완전 꽝이다. 너무 착하다. 말을 꺼낸 나의 입이 부끄러워지게 만든다.
그녀가 내놓는 최선의 호응이란 겨우, 느리고도 온순한 톤의 '긍게이. 왜 그랬디야.' 가 전부다. 탈락!
파트너와의 또 하나의 필수 인프라는 신뢰관계이다.
입 나발을 불어야만 해소될 수 있는 현재의 나의 심적 불편과
타인의 흉보기나 즐기는 자가 아니라는 품격 유지 사이의 모순을 유연하게 수용해 줄 수 있는 믿음이 깔려 있어야 한다.
걸핏하면 남의 흉이나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인간됨의 신뢰에 대한 밑 작업이 선행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금도금작업과도 유사하다.
타인의 흠을 까발리는 행위가 결코 고매한 행위가 될 수는 없겠지만
평소의 합리적 사고와 온유한 성품이라는 이미 확보된 가치에 의해 살짝 금가루가 입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안에 대해 온유하되, 소신 있는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진중함, 독서를 비롯한 인문학적 소양의 전시, 곤경에 처한 동료에게 선뜻 도움을 베푼다거나 최선을 다한 부모 공양 등의 선한 사마리아 인적인 선행의 축적 등이 밑 작업의 전형적인 아이템으로 꼽힐 수 있겠다. 얄팍하고 옹졸한 사람이 아니라는 신뢰의 밑밥들이다.
올해 새로 임용되어 내 옆에 앉은 어여쁜 김샘은 점심 식사 후 가끔 커피도 나누는 신출내기 동료이다.
까마득한 선배인 내게 깍듯하게 다정하며 자주 나의 패션감각에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뒷담화 파트너로서 아직은 부적합하다.
도마 앞에 같이 앉히기에는 그녀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하거니와 아직 밑 작업이 완성되지 않은 까닭이다.
애들 데리고 무슨. 탈락!
상대를 고르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간과 장소이다.
티가 나면 안 된다. 열불이 나 있는 마음의 상태를 들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작심하고 내놓는 흉이 아니라,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라는 식이 되어야 잠식되어 있지 않은 척이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과 장소는 상당한 역할을 한다.
출근하자 마자라든가 퇴근할 무렵의 선택은 별로다.
점심을 먹고 슬리퍼 끌며 일터 주변을 한가하게 산책할 때가 최고다.
한 두 개의 가벼운 이야기 후에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슬쩍 시작하는 게 좋다.
'사실은... ' 또는 '음...' 따위의 망설임 끝에 내놓는 듯한 표현으로 시작하는 게 적절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뒷담화의 핵심은 파트너의 리액션에 있다.
침받이의 역할을 자처할 수 있어야 한다.
분노 혹은 불만으로 가득 찬 칼잡이의 게거품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그 감정을 수용해 줄 수 있어야 제격이다.
목표물에 대해 일단 유사한 농도의 적개심을 보여주는 리액션이 필수이다.
'정말?', '진짜 속상했겠네.'는 약하다.
'뭐 그 따위가 다 있대.', '그런 인간인 줄 몰랐네.' 정도의 강도는 되어야 한다.
각각의 요소들이 잘 갖추어진 뒷담화는 잘 차린 한 끼의 밥상처럼 위안이 될 수 있다.
시원한 배설과도 같이 개운하고, 공들인 상담 후의 치유와도 같이 상쾌할 수 있다.
뒷담화란 상한 감정을 이해해달라는 응석이다.
다 커버린 육체 안에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우리 안의 어린아이가 잡아주기를 바라며 내미는 손이다.
우린 모두 편파적인 내 편이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적절한 뒷담화는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인생의 비결이 참는 것이라면, 정말 그것이 비결이라면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살 수는 없지만 때로 우리는 분노하고 분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그대 고상함에 희생당하지 말고, 뒷담화를 하시라.
영혼의 동맥경화에 고꾸라지기 전에 그대 안에서 그대를 짓누르는 그놈의 뒷다마를 시원하게 까시라.
초가을 새벽, 대파밭에서 밀린 새벽 오줌을 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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