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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하나도 안 괜찮음

 

 

≪엔딩노트≫라는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말기암 판정을 받은 한 평범한 샐러리맨이 죽음에 이르기 전 자신의 삶을 꼼꼼하게 적어나가는 내용이다.

그가 작성한 버킷 리스트 중에는 독특한 목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 번도 찍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였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그것을 실행하고 죽음을 맞이했는지의 여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런 의외성이 버킷 리스트의 참맛이지,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은 생생하다.

 

얼마 전의 대선에서 내가 지지한 후보가 졌다.

모든 게 재미없어졌다. 그야말로 낙이 없어졌다.

5년을 견뎌낼 일이 암담하다.

뉴스를 보는 대신 BTV를 뒤져 무료 영화를 보는 밤들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 될 확률이 몇 억분의 일이라는 점에서 정치인은 정자(精子)와 비슷하다고 한다.

권모술수, 교언영색 따위의 사자성어를 배울 때 우리 한문 선생님은 정치인을 예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가장 진실하지 못한 집단이고, 가장 신뢰할 수 없는 무리가 정치인들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입안자들이고 정책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기에

정치 지도자의 가치관과 철학은 우리의 세세한 삶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다.

 

기차 등받이에 발을 올린다거나 다리를 쫙 벌리고 앉는 등의 단순한 몸짓이 왜 문제가 될까.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미스터 트럼프의 이력에 왜 화가 날까.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치관이 도둑처럼 스며들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희망이 있는 세상이란 명확하다.

다양성의 존중이 제도화되고 모든 이가 인간으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이다.

그 능력을 갖춘 이가 정치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그 능력의 시작은 인품, 즉 사람됨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할 말이 없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후보를 선택한 국민이 더 많았으므로 할 말이 없다.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딱 맞는 지도자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로서

그를 택한 사람들과 택함을 받은 그 양반을 한꺼번에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뿐이다.

 

정치적 성향의 변경이 쉽다면

어찌 버킷리스트에 '한 번도 찍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가 올라왔겠는가.

 

 

에라이~!

 

 

 

 

 

<괜찮습니다>

                               .류근.

또 졌습니다. 괜찮습니다.
군인이 지배하는 나라에도 살아봤습니다.
사기꾼, 무능력자가 지배하는 나라에도 살아봤습니다.
괜찮습니다. 안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우리끼리
서로의 체온을 확인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안 죽습니다.
죽으면 안 됩니다.

진심을 다해서
나쁜 놈이 지배하는 세상 막자고
울며 소리치며 온 힘을 다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아,
우리 시대의 실력이 여기까지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여기까지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힘을 냅시다.
이제 검사가 지배하는 나라에 몇 년 살아봅시다.
어떤 나라가 되는지 경험해 봅시다.
어떤 범죄가 살고
어떤 범죄가 죽는지 지켜봅시다.
보수를 참칭 하는 자들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지켜봅시다.
나라가 어떻게 위태로워지는지 지켜봅시다.
청년과 여성과 노인들이 얼마나 괴로워지는지
지켜봅시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더 가난해지는지
지켜봅시다.
검사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나라
재미있게 살아봅시다.

괜찮습니다.
안 죽습니다.

권력보다
백성과 역사가 훨씬 오래 살아남습니다.
권력은 죽어도
백성은 살아남습니다.
나라는 망해도
백성은 살아남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죽지 말고
살아남읍시다.
검사가 지배하는 나라
재미있게 즐겨봅시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거기 계셔서 괜찮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 괜찮습니다.
진정으로
괜찮습니다

우린 또 이기면 됩니다.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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