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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그의 봄날

 

남편이 올 2월 퇴직을 했다.

겨울방학 동안 하나씩 하나씩 집으로 옮겨진 남편의 물품들을 큰 박스 하나에

차곡차곡 정리하여 서재실의 책상 밑에 밀어 넣어뒀다.

앞으로 다시는 꺼내볼 일 없을 묵직한 여러 개의 감사패,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어놓은 일기장 같은 업무수첩,

평교사 책빠얀디 시절 날마다 애용했던 까닭에 가장자리가 복어 배처럼 불룩 올라온 영어사전,

작은 무리 속에서 한 시절 틀림없이 자부심 노릇을 했을 목각 명패,

그리고 미처 다 쓰지 못한 명함.   

 

선한 사람,

나의 남편은 선한 사람이다.

맹맹하지만 담백한 그 형용사로 적절하다.

그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부연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그의 가치에 대해 상대가 평가절하할까 봐 조바심 낼 필요도 없음을

그와 내가 안다. 그 외의 몇몇 괜찮은 사람들도 안다.

 

다음 세상에서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겠냐는 질문에

이휘재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나요.'라고 사정하는 것을 티브이에서 봤는데

나 역시 다음 세상에서까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는 지루한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그를 복제해서 세상의 몇몇 곳에 뿌려놓으면 이 지구의 봄날이 조금 더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퇴직한 남편 존경하기라고 한다.

그 어려운 일을 내가 맞닥뜨렸다.

명함이나 명패가 이름의 테두리를 수 놓아주던 시절을 뒤로 보내고

존재 그 자체 외에는 그 무엇도 훈수를 던져주지 않는 적막의 시간을 앞에 두고 있는

나의 히스클리프.

존경까지는 몰라도 이뻐해 줄 각오는 되어있다.

 

너무 깊은 책임감과 연한 심성으로

남 모를 고단한 시간을 보낸 그가

이제는

'삐뚤 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처럼'

자신의 봄날을 향해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

늘 꽃이 피지 않아도 충분히 다정하고 고요할 그의 봄날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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