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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같은 지구별에서 만나

 

 

 

 

 

화산에 새로 마련한 가족묘지의 묘비석에 넣을 글이다.

깔끔하고 아담하게 만든 가족묘지를 마련해 놓고 좋아하시던 큰 오빠는

지난 수요일 갑자기 소천하시어, 묘지의 첫 주인이 되셨다.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응급실에 계시다는 연락을 받고 내가 믿는 하나님께 애원했다.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하나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삼 년 만요, 아니, 일 년 만이라도요.

 

 

20대 어느 날, 어찌어찌하여 들어간 낯선 교회의 송구영신예배에서 목사님은

종이쪽지를 하나씩 주시고 마음속 가장 간절한 소원을 적으라고 했다.

누가 볼세라 손바닥으로 가리고 쓴 나의 소원은

'우리 큰 오빠 술 끊고 오래 살게 해 주세요.'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그 짐을 고스란히 지시고 

고된 농사일을 하시느라 술 힘에 의지했던 큰 오빠는 

내겐 한 없이 미안한 사람이다.

이제 그 죄송함을 대신 갚을 사람은 없다. 

 

 

올케 성화에 느지감치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큰 오빠는 

지금쯤 아마도 하나님 품에서 안식하고 계시겠지만 

촌 놈 서울말 흉내 내듯 천국의 안락이 못내 익숙지 않으실 듯하다. 

막걸리 한 잔 걸치고 불콰해진 얼굴로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부르며 손장단 치시며 들썩거리고 싶어서 어찌 계실까.

 

 

수족관의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면서도,

앞 베란다 화초들에 물을 주면서도,

티브이 속 병동의 휠체어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들의 생명 있음이 한없이 부럽다.

 

 

군인이 휴가 나오듯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이 지구별에 소풍 나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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