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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야채 크래카

 

 

고 3 시절 야간학습을 마치고 한 시간 가까운 통학 거리의 버스에서 내리면

마중 나온 엄마는 손에 '야채 크래카'를 들고 버스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곤 했다. 

야채의 풍미가 제법 났던 녹색 비닐 포장지의 그 과자를 좋아했던 나는

그 무서운 밤길을 하나도 안 무섭게 엄마와 바삭바삭 맛나게 걸으며 집에 돌아가곤 했다.

 

 

 

보름달이 만들어 냈던 엄마와 나의 등 뒤의 긴 그림자,

불룩한 가방을 내 대신 들고 걷던 여름밤의 엄마의 슬리퍼 소리,

교회도 다니지 않던 엄마와 같이 부르던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같이 먹자고 내밀어도 너 많이 먹어, 라며 밀어내던 야채 크래카.

 

 

동화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고요하고 따뜻한 삽화이다.

 

 

 

 

 

 

지난 겨울방학은 엄마와 함께한 한 달이었다.

교통사고 이후, 몸과 마음이 약해진 엄마를 혼자 둘 수 없어 우리 집에 모시고 있었다.

사고 직후 걷지도 못하시던 몸 상태는 많이 회복되었지만

유일하게 기억하던 막내딸 내 이름도, 본인의 이름도 더 이상 기억해 내지 못한다.

손가락 장갑을 끼우려면 한~~~~~~~참이 걸린다.

걸핏하면 당신의 집에 가고 싶다고 조르던 일도 예전 일이 되었다.  

 

이제 엄마는 순하고 착한 아기가 되었다.  

언젠가 엄마에게 약속했던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내가 엄마네 엄마 할게, 라던 약속. 

 

그런데도

나의 침대에 일찍 잠드신 엄마 곁에 늦은 시간 조용조용 이불을 들추고 들어가 누울라치면

이불을 당겨 내 어깨를 덮어주신다. 잠결에도 내 손을 잡으며 입술을 달싹거리신다.

'아이고, 손이 차네.'

 

 

그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 엄마의 엄마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엄마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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