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가 되면 평소보다 출근을 일찍 한다.
야무지고 믿을만하다는 이미지까지는 아닐망정
경력이 쌓일수록 게으르고 대충이라는 말은 듣지 말아야지,
라는 다짐이 그나마 3월에는 아침에 눈을 번쩍 뜨게 한다.
얼마 전 읽었던 《부정성 편향》이라는 책의 내용에 의하면
부정적인 내용은 긍정적인 것에 비해 사람들의 뇌리 속에 4배의 임팩트를 준다고 한다.
이른바 '4의 법칙'이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행한 한 번의 불쾌한 말이나 행동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네 번의 호의적 표현이나 칭찬이 필요하다.
한 번 지각을 한 사람이 지각쟁이라는 각인을 피하려면 한 번 일찍 오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적어도 네 번은 일찍 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두 세 명 남짓 앉아 있는 교무실 문을 여는 서두른 출근은 당당하고 여유롭다.
학기초에 특별히 마음 다잡고 신경 쓰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담임 맡은 반 아이들에게 지나친 친절을 조심한다든지,
헤픈 웃음을 절약한다든지 하는 나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전략적이다.
담임으로서 수월한 한 해를 보내기 위한 '엄격하고 깐깐한 담탱이' 코스프레의 일종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새로이 구성된 같은 학년의 동료 교사들을 향한 나의 이미지 관리도 빠뜨릴 수 없다.
품격과 센스, 둘 다 거머쥐기 위한 언행의 강약 조절과 균형 맞추기는
3월 특유의 흥분 가득한 새롭고도 낯선 공기 속에서 불온한 스파이의 밀행처럼 계속된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교정에 벚꽃이 팝콘처럼 펑펑 터지는 3월 말 무렵이 되면
나의 갖가지 노력과 코스프레는 생명을 다한다. 거기까지, 이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나의 본색은 호주머니를 뚫고 삐죽삐죽 나오기 시작한다.
비디오 판독을 통해 겨우 쎄잎(safe~!!)을 얻어내는 발 느린 핀치히터처럼 출근을 하고
아이들에게는 친절하여 만만한 담탱이가 되며,
교무실에서는 그저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어설픈 중늙은이 여선생이 된다.
방어의 두 팔을 내린 권투선수가 되니 스타일 구겨지는 일도 있지만
정형의 틀을 벗어난 내 맘대로의 자유로운 팔놀림으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고단하지 않다.
교정의 붉은 벚꽃 멍울이 이빠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다음 주 초쯤이면 반짝이는 황홀로 가득할 것이다.
'봄이 오면'이라는 표현만큼 설레는 조건절이 또 있을까.
봄이 오면 [ ].
앞의 '봄이 오면'이라는 조건절로 인해 뒤의 괄호 안의 내용은 어떤 말이 와도 두근두근 화사하다.
살아있다는 즐거움, 존재한다는 황홀함이 내 것이기에
그다음의 괄호 안의 결정되지 않은 미래나 타인의 평가에 대해 그다지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
그런 봄이,
지금 곁에 와 있다.
참
좋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