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을 깨끗이 정돈한 후 홀로 소파에 앉아 있노라면
뭘해도 아늑하고 따사로웠다.
졸다깨다 보는 티비도, 풋고추에 막된장 하나 놓고 먹는 혼밥도,
흥얼흥얼 화분에 물을 주는 일도,
자다가 깨어 둘러보는 거실의 어둠침침함조차도,
뭘해도 별미이고 색다른 기분이었다.
마치 모두가 지루한 수업의 교실에 갇혀 있을 때,
환자 코스프레로 조퇴를 하고 홀로 걸어가는 하교 길의 따글따글한 햇살의 맛난 빛줄기처럼.
아아아아아..... 입을 벌리고 별같은 볕을 배터지게 입 안에 흡입하던 날의..
넓은 앞 베란다에 놓을 좁고 긴 독서용 책상을 사야지,
한 동안 끊었던 한겨레신문도 다시 구독해야겠어,
아침 식사는 미쿡식으로 토스트에 과일로 해야지,
밤 늦도록 티비도 봐야지,
잘 때도 침대곁 스탠드도 켜놓고 자야지,
귀가시간 눈치보느라 못 만났던 내 좋은 사람들 몽땅 만나야지.
오늘, 청주에서의 한 달의 연수를 마치고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다.
그렇게 꿈꾸던 혼라이프의 파라다이스가 끝났다.
부풀어 세웠던 계획들이 모두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나름 오동통하면서도 쫄깃하게 누렸던, 다시 올 수 없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 엘베터에서 홀로 내려 대문을 여는 삼 사초 간의 시간에
행여 계단으로 통하는 문 뒤에 숨어 있을 괴한이 튀어나올 것 같은 한기에
온 몸의 솜털이 빳빳이 서는 순간의 공포라든가,
미쿡식은 커녕 귀찮음에 굶기가 일쑤였던 아침이라든가,
뒷 베란다에 산더미 같이 쌓인 재활용쓰레기라든가,
침으로 얼룩진 남편의 냄새나는 베개를 꼭 안고 자는
그리움인지 안쓰러움인지 분간 못할 행각 등의
불가피한 부작용 따위는
파라다이스의 해변에 떠 다니는 벗겨진 쓰리빠 조각 같은 것 정도 아니던가.
오랫만의 집밥에 부풀어 있는 남편을 위해 오늘은 홍어탕을 끓여야겠다.
푹 삭은 홍어에 시원한 무우, 늙은 호박을 넣고, 칼칼한 청양고추 서너 개 썰어 넣으면
콧구멍이 뻥 뚫릴 정도의 숨 막히는 맛이 나올 것이다.
대충 설거지를 끝내고 불룩 나온 그의 배를 물쿠션 삼아 베고서 티비를 봐야지, 재미나게 봐야지~
그러면 또 다른 유토피아가 시작될 것이다.
아차, 토마스 모어가 묘사한 이상향 유토피아( U-Topia)의 뜻은 사실은 No-World라는 뜻이라고 하니,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라'라니, 앗 이런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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