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만으로도 충분한 날이다.
반짝 한파에 오그라든, 모악산 가랭이 가랭이 잔설이
건강한 체모처럼 윤기나고,
가까운 하늘에 비행운이 한가롭다.
갖고 싶은 것이 별로 생각나지 않는 한 낮이다.
홍콩에서 라이타돌 실은 배가 들어 온 것도,
욕망이 소진될 만큼 할매가 되어버린 것도,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될만큼 철이 든 것도,
결코 아니지만
이 즈음
거실 깊숙히 배꼽까지 들어오는 햇살을 보고 있노라면
욕망 무장 해제다.
햇살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다.
진하게 고은 사골국물에 청량고추, 대파 송송
살이 통통한 간장게장, 병치 졸임 정갈하게 차려
점심을 드렸다.
들이치는 햇살을 쟁반 삼아
양촌리 커피도 한 잔씩 했다.
쁘티첼 푸딩도, 말랑말랑한 홍시도 간식으로 나눠 먹고
교통사고 나이롱 환자끼리 한의원 가서 나란히 침도 맞는다.
목욕탕에 가서 등도 밀어드리고 손톱에 빨강색 매니큐어도 칠해 드렸다.
이마트에 가서 분홍색 브래지어도 사드리고 짬짜면도 사 먹었다.
엄마를 흠뻑 누리고 있다.
나에게 엄마는 항상 '안쓰러운' 사람이고
엄마에게 나는 '우리 막내, 아이고 우리 막내'이다.
이번 방학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연약해진, 혼자 계시는 친정엄마를 방학동안 만이라도 모셔와
내 손으로 따뜻하게 보살피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 주 째 접어든다.
골프연습도, 성경읽기도, 영어연수도, 천변걷기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지만
이번 겨울방학은
우리 옴마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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