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독서는 쾌락이지만
또한 '숨을 곳'이기도하다.
별 것도 아닌 것들에 마음이 휘둘릴 때,
형편없이 형편없어 보일 때,
잠시 소나기를 피하고 싶을 때,
책이나 영화 속으로 숨으면,
그 텐트 속 하늘에서는 별들이 그냥 그냥 난장판이다.
너무 좋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나면
뒤꿈치를 한껏 들고 사뿐 걷고싶어진다.
누에처럼 숨도 뉘엿뉘엿 고요히 쉬고싶어진다.
내 머리꼭지까지 남실남실 가득한 그 느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대성당>
안현미의 시집, 이성복의 시론 세권,
그리고 영화 <걸어도 걸어도>
참 좋아서,
아무 것도 안.하.고. 싶.었.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배와 같이
나는 흔들리고 흔들려서 당신의 품속으로
발자국 소리만이 따라오는군요 요꼬하마
파란 불빛의 요꼬하마 "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삽입곡 '블루라이트 요코하마'의 가사 일부이다.
제목도 가사에서 따왔다.
한 여름의 어느날 온 가족은 고향집에 모여 음식을 나눠먹으며 지나간 날들을 회상한다.
10여년 전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한 아이를 구조한 뒤 죽은 아들, 준페이의 제삿날이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단 한 사람, 준페이를 기억하며 보내는 왁자지껄한 하루의 끝에
나오는 노래이다. 누구에게나 몰래 듣는 노래가 하나쯤 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어머니 토시코에게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이다.
젊은 시절 바람 난 남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 불러주는 것을
밖에서 듣고 남편을 불러보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옮기게 된 날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길, 레코드가게에 들러 LP판 하나를 산다.
그렇게 알게 된 노래였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와 같이...
내 마음 속 집, 하늘에
별들이 수도 없이 송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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