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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인간이라는 직업

 

 

체호프는 입센의 작품을 보면서

'인생은 저렇지 않아.'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입센의 세계는 아무리 복잡한 비밀도 결국은 풀리면서 끝나는

너무 문학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체호프는 수수께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수수께끼로 끝난다고,

인생의 질문 앞에서 '난 모른다'라고 중얼거릴 따름이라고 했다고 한다.

 

남편이 골수검사를 받았다.

작년에 시작된 혈소판 수치와의 전쟁이 '저위험군'이라는 설명과 함께

잠잠해지는가 했더니

최근 검사에서 의사가 반드시 골수검사를 해야 한다고 겁을 줬기 때문이다.

검사결과가 나오기까지 열흘 정도 지옥의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모든 게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먹는 둥 마는 둥, 자는 둥 마는 둥, 사는 둥 마는 둥.

지난 금요일, 오전 수업을 다 빼고 남편과 동행한 예수병원 혈액종양내과에서

다행히도 사형선고 집행유예를 받았다.

암으로 분류되는 골수이형성증후군의 위험성이 높지만 아직은 그 수치에 도달하지 않았단다.

비로소 거리의 목련이 펑펑 폭죽을 터뜨렸다.

늦은 아침식사로 현대옥에서 콩나물국밥과 오징어 튀김을 한 접시 배불리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선고가 하나 더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방금 지옥 문 앞에서 유턴한 우리 둘은

콩나물 국밥의 고춧가루가 채 빠지지도 않은 입을 나팔 삼아

'와~~~~~~~~!!'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고함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위험천만했던, 그러나 결국 행복한 금요일이었다.

 

체호프가 파악했던 삶의 본질처럼

곳곳에 목함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가로등도 없는 벌판을 지나가야 하는 것과도 같이

인생길은 위태위태하다.

시가 아니라 지루한 산문이다.

평안은 잠시일 뿐 또 어떤 복병이 불쑥 고개를 들고 나타나 나에게 수류탄을 투척할지 알 수가 없다.

사망선고가 유예된 그 틈을 마치 영원처럼 흠뻑 즐기는 도리밖에 없다.

 

꽃년 꽃놈들 지천으로 난리 난 봄날이다.

 

오늘은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벚꽃 흩날리는 천변을 걸어서 퇴근하고 싶다.

인간이라는 직업을 살아내기 위해 고단한 나 자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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