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나
관계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의례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
"너무 염려하지 마, 잘 될 거야."
"도울 일 있으면 말해."
"위해서 기도할게요."
공허한 말들인 줄 알면서도 때로는 위로가 된다.
종일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쥔 손 안에서
반갑게 느껴지는 잘 못 걸려온 전화벨의 파동이나
번화가의 낯빛 좋은 청년이 아무에게나 베푸는 프리 허그처럼,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진짜다.
열 번 셀 때까지 안 하면 끝이야.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섯
여섯
일곱
여더얿
아홉!
그 뒤에 느릿느릿 붙이는
특별한 숫자,
아홉 반의 반
아홉 반의 반의 반
처럼.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망설임의 뒤끝 긴 숫자가
우리를 이 지상에 존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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