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꿈을 꿨다.
꿈속의 나는 영어 과외를 받는 여고생이었고,
나의 과외선생님은 지현우를 닮은 키 큰 외모에 눈빛이 맑은 고요한 남자였다.
그와 수업하는 시간은 무척 행복했고
머지않아 어찌할 수 없이 그와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다음 수업시간을 기다리다가 꿈이 깼다.
오랜만의 달달하고도 아늑한 꿈이었다.
행여 꿈의 잔영이 흐트러질까 봐 잠자리에 그대로 누워 한참을 음미하며 달달함을 머금다가
살살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모닝응가를 위한 무료함을 달래며 변기에 앉아 핸드폰을 뒤적이다가
영화배우 유승완에 대한 기사를 클릭했다.
영화제작자 강혜정과 유승완 감독의 러브스토리,
≪퐁네프의 연인들≫을 흉내낸 프러포즈가 소개되어있었다.
그 아래 이어지는 내용에 아, 지랄! 이게 뭐야.
나는 후딱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둘이 사귀는 기간에
강혜정은 유승완의 동생인 유승범의 영어과외선생을 자처했다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그렇게나 달달했던 꿈이 겨우 이런 한쪼가리 연예인 기사의 예지몽이었단 말인가.
"희망, 무슨 희망?"
"사는 데 애착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거잖아. 나는 그 희망을 은근히 훼방 놓는 시늉만 하면 됐고."
희망을 훼방 놓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간단히 설명했다.
"그래야 거기 희망이 있다는 걸 알지. 뭔가 잔뜩 어질러놓아야 거기 공간이 있다는 걸 알듯이."
설명을 듣고 나면 더 모를 듯한 느낌이 드는 것. 이 또한 그녀가 가진 희한한 면 중 하나였다.
훼방을 놓아야 거기 희망이 있다는 걸 안다니.
뭔가를 잔뜩 어질러놓아야 거기 공간이 있다는 걸 안다니. 무슨 설명이 이런가.
-권여선, <사랑을 믿다>, 문학사상사, 20쪽
남사스럽게도
꿈 속의 나는 자주 누군가의 애타는 짝사랑을 받는 젊고 매력적인 여자이고
현실의 거울 속의 나는 이미 경수가 끊긴 지 오래인, 머지않아 할무니가 될 중늙은이 여편네다.
황진이 눈썹처럼 가늘고 얇게 달은 몰락하고 있는데
여전히 탐스럽게 부푼 달을 꿈꾸고 있다.
조율이 필요하지만 끝에서 끝으로의 진자의 왕복을 즐기고 있다.
철딱서니 없이 여전히 희망이 많다보니 훼방도 잦다.
볼썽사나운 생각을 하며 걷다가 우연히 돌부리에 걸려 자빠지려 할 때
순간적으로 아차, 다시 선한 마음을 줏어 담듯
12월이라는 계절은 일종의 변곡점이다. 돌부리이다.
21호 화운데이션으로도 가려지지 않게 깊게 자리 잡은 몸과 마음의 색소침착을
이 겨울은 벌거벗은 숲처럼 적나라하게 들춰내어준다.
초록으로 아우성치는 봄날의 설렘과 꿈의 변두리에서
여전히 서성대는 나에게 발길질을 해 댄다.
하지만
제발 철 좀 들라, 는 은근한 훼방이 있다는 것은
아직 쓸만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뭔가 잔뜩 어질러놓아야 거기 공간이 있다는 걸 알듯이.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지만 꿈 꾸는 자가 햇 바람의 질시를 받는 것 아닐까.
자신의 열등한 육체를 저주하다가도 누군가로부터 주먹이 날아오면 몸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차리듯
그러니까 징징대는 그의 생을 한 대 툭 쳐주는 것. 너는 네 생이 싫니? 그럼 내가 망가뜨려줄까?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119
괜찮지는 않고
여전히 흔들리지만
아니다 싶으면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여백은 언제까지나 있는 법이므로
농담을 던지듯 가볍고도 철없이 살고 싶다.
운명이 한 대 쳐주고 싶어 안달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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