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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온새미로

 

 

 

 

1. 사거리 우체국

 

 

 

개학이 이틀 남았다.

엄마를 모시고 점심을 같이 먹었다.

엄마 용돈 잔고를 확인해 드리려 통장을 받아들고 우체국에 갔다.

내 고향 동네의 가장 확실한 이정표였던 그곳은 

입구의 빨간 우체통마저 변함이 없었다. 

 

동산촌 사거리 우체국.

우표를 사서 봉투에 붙여, 작은 구멍 속에 밀어넣으면, 스르르 내려가던 나의 안부.

성인이 된 이후의 기억 속에는 사거리 우체국에 대한 추억은 거의 없지만 

그 후에도 간간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라는 유치환의 시나

 

혹은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의 가사가 나오는 조용필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 시절 내 손바닥 가장자리에 닿던, 우표를 건네 받던 그 창구 시멘트 바닥의 감촉이

잊어버린 이의 익숙한 걸음걸이처럼 서늘한 그리움으로 떠오르곤 했다.

 

 

 

 

 

 

 

2. Don't overuse

 

 

어렵게 찾아간 최고 병원의 의사는 동네 의원의 돌팔이 의사만큼의 성의도 없었다.

그냥 내려오기가 아까워, 이름만 들어봤던 근처의 공원을 산책했다.

무료 전시장에 들러 기획전 한 편만 보았지 

대낮부터 공연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서 수 많은 소극장의 간판들만, 

한글 겨우 깨친 생판촌년처럼 열심히 읽어보았다.

내려오는 고속버스 예약 시간이 한참 남아서

<온새미로>라는 상호명이 맘에 들어, 들어간 카페는 플라워샵을 겸하는 곳이었다.

카페라떼에 곁들여 먹은 티라미슈케익은 점심 대용으로 충분했고

구석구석에 놓인 꽃들도 참 이뻤다.

노란 장미 화분을 하나 샀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배웅을 나오겠다는, 갑자기 연결된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버스시간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갔다.

그리고 손 씻는동안 세면대 구석에 잠시 놓았던 장미 화분을 일부러

그.냥. 두고 나왔다.

 

 

마음을 절약하고 싶었다.

괜한 짓, 그만 하고 싶었다.

 

 

'가르거나 쪼개지 않고 생긴 그대로'라는 뜻을 가지는

'온새미로'라는 순 한글은

생각해보니 아주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어왔던 것 같다.

단지 우리 옴마는 그걸 '온수룸히'라는 사투리로 쓰셨던 것이다.

네 음절 중 세 음절이 다르지만 암시랑토않다.

내가 옴마의 뜻을 이해했으므로.

 

 

어리숙한 여종원이 묶어놓은 느슨한 포대자루처럼

자꾸만 넘어지는 마음들도,

생채기 난 가슴들도,

 

 

'제법 괜찮게 살고 싶다'는

본질만 잃지않는다면

온수룸히 다시 스스로의 몸을 세우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차 한 잔을 함께 마셔도 기쁨에 떨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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