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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뜸잠

 

개학을 했다.

오랜만에 담임을 맡은 까닭에 모든 게 새잽이여서 두새두새 뚝딱거리고 있다.

게다가 중학교 1학년의 담임의 업무란 방문요양보호사의 잡무의 스펙트럼과 거의 맞먹는다.

나무늘보 같았던 겨울방학의 하루하루가 아슴하다.

 

방학의 달콤함이란 뭐니뭐니해도 알람을 켜놓을 필요 없이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의 몸이 더 이상 잠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잠의 욕망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소진될 때까지 잠을 자다가 거실로 나온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거실에 널려있는 지난밤의 흔적들을 발로 살살 밀어내어 공간을 만든 후

거실 장판에 따땃하게 불을 넣고 다시 눕는다.

때로, 이미 아침을 맞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 십 분만 더 잘게."

짧게는 십분, 길게는 30여분으로 이어지는 이 잠을 나는 '뜸잠'이라고 부른다.

밥을 지을 때 센 불에서 후루루 끓인 후,  약한 불에서 쫀득쫀득 적당하게 퍼지는 뜸 들이는 시간에 빗댄 표현이다.

YTN 뉴스가 백색 소음으로 깔린 상태에서, 얕은 잠 속으로 고개를 넣었다 뺐다를 느리게 반복하는 유영의 시간은

그 어떤 램수면의 깊이보다 달콤하고 아늑하다. 

본격적인 하루의 몸통과 무리 없이, 거리낌 없이 이어주는 낫낫한 징검다리이다.

나는 뜸잠을 참 좋아한다.

 

 

-박현주 작가님의 그림책 <이까짓 거!>

 

 

 

뜸이 필요한 것은 잠만이 아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큰 고모의 딸, 그러니까 고종사촌과 골프를 친 적이 있다.

여섯 남매의 막내인 나는 친척들과의 교류에서 주역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 나는 여전하고도 영원한 어린 막내여서 집안의 애경사에서 오랜만에 만난다고 해도

고작 '아이고 우리 선희도 이젠 손자 볼 나이가 되었네.' 정도의 한 마디 정도만을 던지고

곧바로 오빠나 언니에게로 향한다. 

고종사촌 현순이 언니와 골프 약속을 잡았다는 언니의 연락을 받고 내심 설레었다.

골프를 하니 이런 조합의 만남도 있구나 싶었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현순언니는 근동의 종합고등학교를 다니던 또래들과는 달리 자주색 교복에 베레모를 쓰고 버스를 타고 전주 시내에 있는 여고에 다니던 키 크고 세련된 언니였다.

갖가지 화초들이 화단에서 단정히 자라던 터 넓은 기와집의 큰 고모네를 떠올리며 옛 시절의 추억을 같이 나눌 시간을 기대하며 비싼 골프옷도 새로 샀다.

 

몇 십 년 만에 만난 현순언니는 예전의 그 언니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무너진 체형이나 그에 따른 물기 없는 걸음걸이와 말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섯 시간에 가까운 라운딩 시간 동안 새된 소리로 '굿샷! 나이스샷!'을 외치는 사이사이 나눈 이야기의 대부분은 아쉽게도 서로 교집합이 전혀 없이 겉도는 건조한 정보의 나열뿐이었다. 

 

'큰 고모댁 하면, 저는 안방에 있던 장롱의 서랍 손잡이가 떠올라요.

하늘색 구슬모양이었는데 그 작은 구슬 속에 눈썹달 모양의 무늬가 있었거든요.

하도 예뻐서 그것을 오래도록 만지던 기억이 나요.'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또렷한 기억을 떠올려 말을 건넸을 때

현순언니는 별 감흥 없이 '그래? 나도 알 것 같네.'라고 가볍게 대꾸하더니 다른 대화로 곧바로 옮겨갔다.

자매들끼리 자주 해외여행을 간다는 둥,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골프를 친다는 둥,

딸 내외가 병원에서 근무한다는 등의 간접과 직접을 오가며 쏟아놓는 자랑질에 치여 그다음 내 머릿속에 떠올렸던 기억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깊은 우물가 가장자리에 윤기 나게 열려있던 길쭉길쭉한 보라색이 진했던 가지의 풍경이랄지, 나의 머리를 땋아주며 틀어주었던 전축에서 흘러나왔던 '해는 서산에 지고'로 시작하는 노래 등의 아늑하고도 다정한 기억을 같이 나눌 수가 없었다. 

싸인까지 하여 준비해 간 나의 책 두 권을 골프가방에서 다시 꺼내자 남편은 왜 주지 않고 그냥 가져왔냐고 물었고 나는 '주기가 좀 그랬어.'라는 애매한 답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의 힘에 밀려 울퉁불퉁 어긋난 정서가 가져다준 씁쓸함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너무 교류가 없었던 3, 4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가져다준 쓸쓸함이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쌀을 씹은 것이다. 너무 벌떡 일어난 것이다.

 

뜸이 필요한 것은 밥이나 잠만이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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