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 rose for Emily

늦가을의 풍경

 

 

박카스 병을 볼 때마다 나는 순간적으로,  잠깐 멈칫한다.

꼭 그 안에 재봉틀 기름이 들어있을 것만 같아서다.

어릴 적 우리 엄마는

재봉틀이 뻑뻑할 때 조금씩 발라주던 '미싱 기름'을 꼭 박카스 병에 담아놓고 쓰시곤 했기 때문이다.

기름이 상표에 스며들어 겉면에 약간의 기름얼룩이 묻어 있던 박카스 병은

후마끼(모기약)나 디디티가 올려져 있던 마루 위 선반 한 구석에 얌전히 같이 올려져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면

논밭으로 토종개처럼 동동거리며 다니던 잦았던 발걸음도 시나브로 한가해지고

그럴 때면 엄마는

윗방 구석에 밀쳐뒀던 철제 싱가 재봉틀을 꺼내곤 하셨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의 베갯잇의 양끝에 붙일 이쁜 모양새의 베갯잇 귀를 만드셨다.

알록달록 작은 천조각을 이어붙여 색동무늬를 만들기도 했고

쫌쫌히 주름을 잡아 가운데를 묶어 다알리아 꽃봉오리 모양을 만들기도 하셨다.

그 옆에서 나는 너무 작아 쓸모가 없어 버려지는 노랑색, 다홍색 천조각을 주워서 모으곤 했다.

 

한바탕 베개닛 작업이 끝나면 가을이 깊어졌고

앞마당 화단에는 가지각색의 국화꽃이 흐드러졌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할머니와 엄마가 하는 작업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집안의 문들을 떼어 새 문종이를 다시 붙이는 일이었다.

풀을 쑤고 크기대로 잘라 양쪽에서 맞잡아가며 새로 붙인 한지로 단장한

미닫이, 여닫이 문들은 토방에 비스듬히 걸쳐져 따글따글한 가을볕과 바람을 쐬며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햇살향을 품으며 말라갔다.

그런 날에는 나는

마당을 가로지르는 긴 빨랫줄에 널린 이불 사이를 깨금발로 콩콩거리며 돌아다녔다. 

이불 호청에서는 바삭바삭한 햇볕냄새가 났다.

 

 

또 그런 날에는

엄마는 며칠 전부터 유난히 색이 고운 국화나 모양이 온전한 단풍잎, 은행잎들을 따서

다듬이 돌 아래 잘 눌러두곤 했다.

그리고 문에 새로운 한지를 붙이는 날에 꺼내어

문의 가장자리 손잡이 옆에, 말려두었던 그것들을 넣어서 꽃문을 만드셨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거나해진 모습으로 대문을 밀고 들어오시던 아버지는

꽃문을 보시고 

'씨잘디없이 문짝에다가 야냥게를 떨었디야.' 한마디 하셨지만

내심 발그레진 얼굴로

다알리아 꽃봉오리 베갯잇 베개를 베고 이른 잠에 들곤 하셨다.

 

사시사철 제대로 신발 꿰어 신을 틈도 없이 바빴던 엄마는

계절의 사이사이 그렇게 투박하게나마 삶에 별빛을 섞고 사셨다.

시 한 줄 쓰지 않고서도  시인이 되곤 하셨다. 

 

덕분에 엄마의 딸, 나는

후루꾸 야매 시인이 되었다.

 

 

 

 

 

 

 

 

 

 

 

 

'A rose for Emil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 삼촌 묘 벌초하듯  (1) 2023.10.04
전원을 껐다켜면,  (0) 2023.09.26
범 내려온다  (0) 2023.09.01
rhyme and reason  (0) 2023.08.28
fragile  (0) 2023.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