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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fragile

 

그 현상을 어떻게 표현할까 난감할 때마다 나는 영어 단어 fragile이 떠오른다.

깨지기 쉬운 내용물을 담고 있는 상자의 겉면에, 금이 간 와인잔 모양의 그림 아래 쓰여 있는 그 단어가

그나마 그 복잡한 심리의 지점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해준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현상이나 지점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원인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How fragile we are!

 

 

 

 

 

 

티비를 보며 한가하게 놀던 어느 저녁,  갑자기 준빈이라는 학생이 떠오른 게 문제였다.

초등학교 때 겪은 급우간의 문제 이후, 학원과 집에서는 대화에 아무 문제가 없다 하나

학교만 오면 일체 입을 열어 발화하는 행동 자체를 하지 않는 학급의 독특한 아이였다.

잘 생긴 외모에 공부도 제법 잘하는 준빈이를 볼 때마다 안쓰럽기도 하고

꼭 치료를 받아 흠집이 없는 원만한 성인으로 자라도록 담임으로서 도와줄 방도를 고심하기도 했다.

하여튼 그날 밤 갑자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준빈이의 목소리에 생각이 닿았다.

그 단순한 궁금증은 급속도로 발효되어 부풀어 오르더니 '들어보고 싶으나 결코 그럴 수 없는' 답답함으로 이어졌다.

순간 식은땀이 흐르면서 밀폐된 공간 안에 갇힌 듯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통제불가능한 불안한 마음으로 거실과 베란다를 한참이나 오가며 시간을 보낸 후,

어찌어찌하여 밤을 힘겹게 보낸 그런 날이었다.

우습게도 그 다음날 출근하여 준빈이를 불러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목소리를 한 번만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준빈이는 모기만 한 소리로, 예! 대답해 줌으로써 나를 살려줬다.

 

사실,

그 증상의  발단은 몇 년 전 호주 브리즈번으로 한 달 영어과 연수를 갔던 날로부터 시작되었다.

치매에 걸린 엄마를 두고 떠난 연수는 홈스테이 하우스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엄마에게 도착 전화를 걸면서 망가지기 시작했다.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언제 오냐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듣고 난 후

나는

나를

잃고

말았다.

대양을 가운데 둔 엄마와의 거리와 한 달이라는 시간을 떠올린 순간,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한 마음은 식은땀과 불면으로 이어졌었다. 무엇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완전히 무너져버린 나는 일주일 만에 보따리를 싸서 허겁지겁 귀국을 했었다.

죽을 것만 같았기에 연수 포기에 대한 부끄러움을 생각할 틈도 없었다.

 

한 번 강펀치에 골절된 영혼은 깊은 흔적을 남겨

그와 유사한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또 휘청인다.

그러다 보니 

해결할 수 없는 힘겨운 일이나 부정적인 생각의 입구에 이를라치면 겁이 바짝 난다.

필사적으로, 냉정하고도 신속하게 생각의 물꼬를 틀어버리려 노력한다.

유일한 생존법이다.

 

 

 

홍균이와 함께 한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의 세 번째 날의 호텔 Torre De Los Guzmanes은

세비야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오렌지 과수원으로 둘러써인 정감 있는 풍경을 담고 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혼자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그러다가 분꽃 무더기를 발견했다. 

'어머나, 스페인에서 분꽃이라니.'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이국 땅에서 발견한 그 꽃을 몇 개 따서 홍균이에게 보여줄 때까지만 해도

여름밤이면 동산촌 우리 집 대문간 화장실 옆에 소복하게 피어, 밤새도록 향기를 내뿜던 

그 옛날의 분꽃 무더기를 떠올리며 즐거웠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베리아 반도, 낯선 그곳에서 만난 분꽃이

천국 가신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엄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의 실타래를 끄집어내어 버렸다.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숨막히는 불가능에 또 다시 직면한 것이었다.

질식할 것 같은 그리움에 시달리다가

결국 준비해 간 수면유도제에 의지하여 겨우 잠이 들었다.

 

 

 

'이 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일본의 잇사라는 사람의 하이쿠다.

 

나이는 들어가고

얄짤없는 현실은 모질고 거칠기만 하여

맞닥뜨려 견뎌내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방도가 없는 일이 허다한데

내 영혼은 이렇게 무르고 허술하기만 하니

클났다.

 

How fragile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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