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있기 괴로운 투머치의 감성들이 있다.
예를 들면
촛불을 켜고 둥그렇게 앉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부른다랄지,
짝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백지로 된 편지를 보낸다랄지
느린 우체통에 일 년 후에 나에게 도착할 엽서를 써서 넣는다랄지,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면 낯간지러운 한 물 간 감성이어서
'무슨 그런 짓을 다 했는지 몰라, 참나.' 하며 입을 가리지만
사실은
한 시절, 우리를 소녀로, 소년으로 만드는데 한 몫했던 멋진 아이템들이었다.
여고생이었던 그 시절, 우리를 키운 건 8할이 침 삼키는 소리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라든가 '이종환의 디스크쇼'라는 라디오 프로가
우리 여고생들의 발그레하게 팽창한 맹목의 그리움과 감성에 촉촉하게 물기를 뿌려줬었다.
신청곡을 들려주는 사이사이 청취자의 사연을 읽어주는 전개였는데
사연을 읽는 DJ는 유난스레 침 삼키는 소리를 많이 냈었다.
문장이 끝날 때마다 느리고도 낮게 목젖이 누었다 일어나는 끈적이는 미세한 사운드는
아마도 교묘하게 계산된 나름 에로틱한 연출이었던 것 같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 자주 드나들던 커피숍이 있었으니, 큰 도로에 면한
'토요일 토요일 다방'이라는 다방이었다.
길쭉한 홀의 한 구석에는 DJ 박스가 있어서 그 앞에 준비되어있는 쪽지에 신청곡을 적어내면
들려주던 그 시절 전형적인 음악다방이었다.
한 때 그곳의 인기 DJ였던 호섭인가 호철인가하는 불문과 남학생에게 한 동안 빠져있던 나는
강의가 없을 때면 그곳에서 죽치고 시간을 보냈곤 했다.
손님의 신청곡이 없을 때에는 그 고요의 시간을 메꾸어주던 단골 노래가 있었으니
그즈음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들었던 노래였다.
'모나코 뱅트위 드그레 ~'
로 시작하는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만저만 임팩트 강한 게 아니었던 <모나코>라는 샹송이었다.
가사의 사이사이 일종의 내레이션 같은 굵직한 저음의 남자의 목소리, 모나코! 하는 발성은
더 이상 느끼할 수 없는 극강의 느끼함이었다.
그에 못지않은 난형난제, 용호상박의 느끼함의 음반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산포 어쩌고 저쩌고로 이어지는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 낭송이었다.
역시 굵은 저음의 중년 남성의 목소리는 어찌나 비장하게 들렸던지 내용도 정확히 모르면서도 숙연해졌던 것 같다.
모나코가 되었든 성산포가 되었든 지금은 한 소절 참아내며 듣고 있기가 힘들다.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해 내는 방식에 대한 취향이 변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결정적 시기라든가 발달단계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딱 그때 그 시절, 우리가 경험하고 겪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 간다.
그 시절을 생략하고 뛰어넘어버리면 간혹 퇴행이나 집착이라는 모습의 탈이 나기도 한다.
유치해야 할 때는 유치해야 한다. 삶의 어느 과정에서는 느끼함도 멋짐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 터널을 통과하여야 비로소 적재적소에 적절한 행동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담백하고 멋진 어른이 된다.
내일은
호섭DJ가 그렇게도 자주 틀어대던 그 시 속의 성산포, 성산일출봉을 올라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유튜브를 뒤적거려 그 시절의 시낭송을 다시 한번 들어봐야겠다, 꾹 참고.
-방주교회: 일본의 건축가 이타미 준이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설계
-방주교회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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