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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귀 빨개지는 남자 2

 

 

간혹 가지는 술자리에서 나는 술이 제법 센 여자로 알려져 있다.

달음질이 가능한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술 심부름을 다니던  

애주가 조씨집안의 막내라는 유전적 자신감과

술자리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객적없는 만용으로 홀 딱 홀 딱 거절 없이 주워 마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술이 센 여자로 알려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나의 얼굴색 때문이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얼굴색이 붉게 변하지 않는다. 평상시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티가 안 난다.

 

 

변하지 않는 얼굴색과는 달리, 사실 나는 술이 세지 않다.

소맥이 몇 순배 돌면 울렁울렁 벌써 토하고 싶어 진다.

명성에 걸맞지 않은 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침이 겔겔 입안에 괼 때까지 최대한 참고 있다가

소변을 보는 척 화장실에 가서 변기통을 붙잡고 토해낸다.

행여 토사물의 냄새로 인해 그다음 화장실 사용자에게 들킬까 봐 서너 번씩 물을 내리고

수돗물로 입을 헹구고 눈에 힘을 주며 거울 속의 모습을 단장한다.

표가 안 나게 하기 위해.

 

 

어렸을 때 나의 로망 중의 하나는 발그레하게 뺨이 붉어지는 것이었다.

수줍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막 익기 시작한 사과처럼 귀밑 목선에서 시작하여 

두 볼이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은 내게 가장 소녀스럽고 동화적인 모습으로 여겨졌다.

정말 넋이 나갈 정도로 쪽팔리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처럼

얼굴이 화끈화끈 마구 달아오르는 일은 간혹 있었지만

소년의 등에 업힌 윤초시네 증손녀처럼 붉어진 뺨이 수줍음을 고요히 설명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붉으락푸르락,

감정이 바로바로 얼굴에 드러나는 일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미성숙의 증거이기도 하다.

초짜일수록 손안에 쥔 패의 내용을 표정으로 상대에게 누설한다.

고수일수록 포커페이스에 능하다.

마지막 승부의 패를 내던질 때에야 압축된 감정을 한 방으로 터뜨린다.

멋지다.

 

 

하지만 감정을 외면하는 절제란 때로 얼마나 고되고도 삭막한 일인가.

성숙은 켜켜이 쌓아 올린 담벼락이 되기도 한다.

 

티가 난다는 것은 때로 참 다행스럽고 아늑하게도 인간적이다.

담벼락에 뚫린 구멍이다. 그것을 통해 비로소 비밀인데 비밀이고 싶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화장실 거울 속의 내가 아무리 새단장을 하고 게워낸 입 안을 헹구고 나와도

나의 술벗 경숙이만은 나를 알아차린다. 배시시 맞웃음으로 화답할 뿐이다.

 

 

옛 그룹 '버즈'의 민경훈이 어울리지 않게 예능 프로에 심심찮게 등장하더니

요즘은 두세 개의 프로에서 나름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입심 좋은 개그맨들이 주를 이루는 프로그램에서 말수 적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그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라는 우려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자신의 분량을 채워가며 서바이벌하고 있다.

<옥탑방의 문제아들>이나 <아는 형님>의 패널로 활약하고 있는 그가 가장 재미있어지는 지점은

바로 귀가 빨개지는 모습이다. 

여자 출연자와 짝을 이루는 상황이나 조금이라도 색깔이 들어가는 상황이 되면

돋보이고자 하는 왁자지껄 시끄러운 패널들의 소란 속에서 여지없이 그의 귀는 조용히 붉게 물들어간다. 

'또 경훈이 귀 빨개진다!' 

 

작가의 대본과 짜인 각본에 따라 이루어지는 연기라는 설정에 그의 빨개지는 귀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의 노출이다.

아름답다. 

 

 

티가 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도 귀가 빨개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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